“이런 상태라면 쌀 등급제가 아니라 쌀 미검사 표시제로 정착될 것입니다.”
햅쌀 출하를 앞두고 산지에서 쌀 등급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쌀 등급제는 완전미율에 따라 1~5등급·미검사로 표시, 소비자들의 쌀 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 지난해 11월 도입됐다. 11월부터는 단백질 함량 표시도 의무화된다.
그러나 강원도내 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에서는 올해 햅쌀을 미검사로 출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등급을 표시하기엔 제반시설이 완벽하지 않고, 만일의 실수로 허위표시로 적발될 경우에 받게 되는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강원지역 한 RPC 장장은 “농지에 따라 미질의 차이가 있는 데다 여러 농가의 쌀이 섞일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등급표시를 완벽하게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또 “설령 1등급을 확신하더라도 샘플조사를 통해 단 1포대에서라도 허위표시가 적발되면 경고나 영업정지와 같은 행정처분을 받는데 과연 1등급으로 표시해 출하할 수 있는 RPC가 몇곳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분석장비마저 서로 다른 상태에서 생각하지 못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는 등급을 하향표시하거나 아예 미검사로 출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주군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 박금용 본부장은 “2011년산 쌀은 1등급으로 표시하지만 단백질 함량은 미검사로 유통하고 있다”며 “단백질 함량은 지역 농가마다 다를 수 있고, 유통과정에서도 수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검사를 하더라도 표기는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동사업법인에서는 일부 대형유통업체에서 단백질 함량 표기를 요구하는 경우 실제 검사에서 ‘수(낮음)’가 나왔더라도 ‘우(중간)’로 한단계 낮춰 표기해 납품하고 있다. 최근 생산을 시작한 2012년산 조생종은 등급과 단백질 함량 모두를 미검사로 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기 화성 수라청연합RPC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문제는 또 있다. 자칫 쌀 유통 주도권이 대형유통업체 등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원지역 다른 RPC 관계자는 “지금은 대형유통업체에서 등급표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납품에 큰 지장이 없지만 등급표시를 요구할 경우 하향표시된 등급이나 미검사 등을 이유로 가격을 후려지거나 납품을 중단시키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철원지역의 경우 지금까지 애써 쌓아온 <오대쌀> 명성을 버리고 대체품종을 선택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철원지역은 지역 특성상 조생종인 <오대쌀>이 적합한데다 품질과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도 높아져 있지만 현재의 쌀 등급제 기준으로는 3~4등급으로 표시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오대쌀>은 품종 특성상 낟알에 흰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철원의 한 RPC 관계자는 “이 때문에 <오대쌀>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며 “과연 누구를 위한 쌀 등급제인지 진지하게 재검토해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화성 수라청연합RPC 김철호 단장은 “소비자들이 쌀을 선택할 때 등급표시보다는 브랜드나 지역산을 보고 구매하는 게 보통인데, 소비자에게 별 실익도 주지 못하면서 산지에 부담만 주는 제도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농식품부 관계자는 “대부분의 RPC가 분석장비를 갖추고 있고, 장비가 없는 RPC나 임도정공장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시·군 사무소에 (분석을) 의뢰하면 된다”며 “또 정상적인 작황상태에서는 분석 결과의 오차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현재로선 등급제를 시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