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름날 약밥 제도 신라적 풍속이라, 묵은 산채 삶아내니 肉味(육미)를 바꿀쏘냐, 귀 밝히는 약술이며 부스럼 삭는 生栗(생률)이라.’ <농가월령가> 정월령에 나와 있듯, 대보름은 그야말로 먹고 즐기며 한해의 안녕을 비는 날이다. 잔치가 흥겨운 것은 맛난 음식이 넘쳐나기 때문이기도 하니, 대보름은 봄 농사를 앞두고 기력을 보충하는 날이기도 했다.
대보름 절식(節食)으로 대표적인 것은 오곡밥이다.
쌀·조·수수·팥·콩 등을 섞어 짓는 오곡밥은 풍년 농사를 비는 뜻이 담겨 있어 ‘농사밥’이라고도 한다. 오곡(五穀)의 종류는 시대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수수나 팥이 나지 않는 지역에서는 보리·기장을 넣어 오곡이라고 하기도 했다. 오곡은 딱히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곡식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여기에 잣·대추·밤 등을 넣어 영양분을 더했다.
이 오곡밥은 여러 집의 밥을 먹어야 여름에 더위를 안 먹는다고 해서, 아이들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밥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풍습을 ‘조리밥’ 또는 ‘세성받이밥’ ‘백가반’이라고 한다.
조리밥은 조리를 들고 다니며 밥을 얻었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세성받이밥은 타성(他姓)을 가진 세집 이상, 백가반은 백가(百家·여러 집)의 밥을 먹어야 운이 좋아진다고 하여 붙여졌다.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는 이러한 풍습을 제삿밥을 나눠 먹는 전통에서 시작된 것으로 봤다.
정월대보름은 ‘나물 명절’로 불릴 정도로 나물을 많이 먹는 날이기도 하다. 전해에 채취해서 말려 뒀던 묵나물들을 물에 삶아 불렸다가 볶거나 무쳐 먹는데, 이 또한 더위를 이기기 위해 행해지는 풍습이다.
대보름날 먹는 묵나물은 진채(陳菜)라고도 하며, 호박고지·취나물·가지·버섯·고사리·도라지·시래기·박나물·아주까리잎·토란대 등을 이용했다. 이 묵나물은 지역에 따라 종류가 조금씩 다르다. 강원도처럼 산이 많은 곳에서는 주로 취나물을 이용했으며, 바닷가 마을에서는 모자반 같은 해초를 말려 뒀다가 나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또 ‘복쌈’이라고 해서 취나물이나 김에 밥을 싸먹는 풍습도 있었다. 복쌈은 맛도 맛이려니와 복을 싸서 먹는다는 주술적 의미까지 곁들여졌다. 이 복쌈을 여러 개 만들어 볏단 쌓듯이 쌓아 성주신(집을 다스리는 신)에게 먼저 올린 다음 먹으면 복이 온다고 믿었다.
호두·밤·은행·잣 등 견과류를 어금니로 깨무는 ‘부럼깨기’도 대보름에만 있는 음식 관련 풍속이다.
부럼은 한해 동안 각종 부스럼을 예방하고 이를 튼튼히 하기 위해 깨물었는데, 대개 첫번째 깨문 것은 “올 한해 무사태평하고 부스럼 안 나게 해주시오”라는 주문과 함께 마당이나 지붕에 던지고 두번째 것부터는 버리지 않고 먹었다. 이빨이 약한 사람들은 견과류 대신 무를 쓰기도 했다. 부럼깨기 풍속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좋은 음식에는 술이 빠질 수 없는 법. 대보름날 아침에는 귀가 밝아지라고 ‘귀밝이술’을 먹었다. 아침 식사 전에 먹는 귀밝이술은 청주(淸酒)를 데우지 않고 차게 해서 마셨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입을 댔다. 평소에는 함께 술자리를 하기 어려웠던 부자지간에도 이 술만큼은 함께 마셨다. 귀밝이술은 재앙을 막고 복을 부르는 제화초복(除禍招福)의 세시풍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