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봄인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눈발이 날린다. 한반도 정세 이야기다. ‘평화’라는 목적지에 닿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런 현실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과 분단의 현실을 그린 <공동경비구역 JSA>다.
고민할 것 없이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결정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충남 서천이다.
충남 서천의 ‘신성리 갈대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여름 장마 같은 봄비가 내리는 탓에 갈대밭 풍경이 스산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다. 그러나 서울에서 출발한 지 3시간 후 이런 생각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비가 그친 뒤 안개가 내려앉은 갈대밭은 더할 나위 없이 운치 있었다. 방죽 위에 서서 그 정경을 잠시 감상했다. 봄바람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는 안개 사이로 거대한 초록빛 파도가 일렁였다.
본격적인 갈대밭 탐험에 나서기로 했다. 입구에 세워진 갈대밭 안내도를 찬찬히 살폈다. 갈대밭은 솟대소망길·갈대기행길·갈대문학길 등 여러 테마로 구성돼 있었다. 구석구석 모든 길을 다 가보리라 다짐하며 발걸음을 뗐다.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익은 인물들을 만났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주인공인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 소피 소령(이영애 분)의 사진판이었다. 누가 봐도 이곳이 영화 촬영지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칠흑 같은 밤,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던 이 병장은 우거진 갈대밭에서 지뢰를 밟고 낙오한다. 옴짝달싹 못하는 그 앞에 나타난 북한의 오 중사. 팽팽한 대립 끝에 결국 오 중사는 이 병장의 목숨을 구해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형·동생 사이가 된다. 위험하지만, 가슴 따뜻한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 병장의 낙오지점이었을 법한, 갈대밭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허리 정도 높이의 갈대숲이 이어졌다. 그 속을 거닐며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솨~사각사각~” 바람에 몸을 맡긴 갈대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여기에 사방을 에워싸는 싱그러운 녹색의 풀 향기까지 더해지며 뭔가로부터 무장해제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갈대밭 하면 으레 은빛의 가을 갈대밭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 여행 이후로는 초록빛으로 물든 봄날의 갈대밭이 먼저 생각날 듯하다.
평온함을 느끼며 갈대밭을 걷다보니 이윽고 금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 자욱한 강과 강변을 둘러싼 연초록 갈대숲이 어우러진 정취는 세상사 온갖 시름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찬바람이 불 때 즈음 은빛으로 갈아입은 갈대밭을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두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서천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국립생태원 에코리움.
갈대밭에서 차로 1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2013년 개관 이후 서천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국립생태원이다. 국립생태원은 부지면적만 99만8000㎡(30만여평)에 이르는 광활한 생태전시공간이다.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곧장 ‘에코리움’으로 향했다. 이곳은 열대·사막·지중해·온대·극지방 등 세계 5대 기후대별 생태계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작은 지구로 불린다. 사막여우·젠투펭귄 등 희귀종 앞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꼬부랑 할머니도, 희끗희끗한 머리색의 할아버지도 한껏 들뜬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덩달아 신이 났다.
갈대밭부터 생태원까지, 자연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다보니 반나절이 금세 지났다. 아쉬움에 이번엔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