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절반 이상은 여성(2018년 기준 51%)이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농촌문화 탓에 여성농민의 사회적 지위는 아직까지 열악하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2018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농민이 자신의 지위를 남성농민보다 낮게 인식하는 비중은 81.1%나 된다. 여성농민은 체력이 약한데도 농사와 가사를 병행해야 한다. 남녀차별로 대외활동에도 제약이 따른다. 이러다보니 여성농민의 생활 만족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농촌이 잘 살기 위해선 영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여성농민이 행복해야 한다. 이에 <농민신문>은 2회에 걸쳐 여성농민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김경자씨가 작업장에서 포장한 청경채를 들어보이고 있다.
시설채소 농사짓는 김경자씨<경기 용인>
채소류 포장·식사 준비 등 새벽에 일어나 일과 시작
인건비 아끼려 고된 작업 “여유 갖고 싶지만 못 그만둬”
오전 5시. 시설채소농가 김경자씨(59·경기 용인시 모현면 일산리)는 어김없이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농장의 작업장을 찾아 출하할 채소류를 포장하고 스티커를 붙인다. 40분 정도 걸리는 짧은 작업이지만 외국인 근로자 일손을 덜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다.
6시쯤 집으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남편 노규완씨(60), 둘째 딸과 함께 식사를 한 후 7시20분쯤 집을 나와 소포장한 채소를 인근 모현농협 로컬푸드직매장에 가져가 진열한다.
대학원에 다니는 둘째 딸을 가까운 전철역에 데려다주니 시계는 오전 9시를 가리켰다.
두 딸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아이들을 인근 지역 학교에 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은 엄마 김씨 몫이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육아·교육 문제였다”면서 “농사에 얽매여 어릴 때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오전 9시15분. 김씨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작업을 시작하는 농장에 다시 도착했다. 하루치 작업 분량을 알려주고 포장지 스티커 부착 작업도 이어갔다.
김씨는 “외국인 근로자가 7명 있지만 농장을 맘 놓고 비우진 못한다”면서 “일일이 작업지시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년 치솟는 인건비를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선 직접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점심식사 후에도 고된 농작업은 계속됐다. 김씨 부부는 시설하우스 40동(2만1157㎡·6400평 규모)에서 상추·적겨자·청경채 등 10여가지 잎채소를 파종·수확·선별·포장·판매하는 작업을 연중 쉴 새 없이 이어간다.
김씨의 고된 일과는 오후 7시께 얼추 마무리됐다. 그는 “주말이나 명절 등 출하량이 한꺼번에 몰릴 때는 다음날 오전 1~2시까지도 작업을 한다”고 했다.
30대 초반에 귀농해 30년 가까이 남편과 함께 억척스럽게 일해 매년 억대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그는 여자로서의 삶을 고스란히 포기해야만 했다. 김씨는 “이제는 좀 여유를 갖고 친구들과 차 마시고 수다 떨면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지만 바람일 뿐”이라면서 “치솟는 인건비와 경영비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손 놓을 수 없는 게 농촌현실”이라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김씨는 “여성농민 복지 지원정책인 행복바우처사업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면서 “금액을 좀더 늘리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도 이야기했다.
제주 한경면 저지리의 여성농민 강미애씨가 감귤밭에 퇴비를 주고 있다.
체험농장 운영하는 강미애씨<제주>
자녀 밥 먹여 등교시키고 체험객 맞을 채비로 분주
퇴비주기 등 농장관리도 “남편에게만 맡길 순 없어”
10여년 전 귀농해 남편과 ‘미애수다뜰’이라는 체험농장을 운영하는 강미애씨(43·제주 한경면 저지리)는 매일 오전 5시면 일어난다. 수면부족으로 감긴 눈을 억지로 뜬다. 그러고는 바로 집앞 농장으로 향한다. 강씨는 봄·겨울에는 딸기와 감귤, 여름에는 옥수수, 가을에는 콜라비와 비트를 수확한다. 재배면적은 시설하우스와 노지를 합쳐 3만3000㎡(1만평)가량. 요즘은 딸기 수확이 한창이라 할 일이 산더미 같지만 7시30분부터는 자녀를 등교시켜야 한다.
강씨에게는 고등학생인 큰딸과 초등학교 6학년·1학년인 아들 둘이 있다.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 셔틀버스에 태우고 나면 한시간은 훌쩍 지난다. 그나마 큰딸은 평일 기숙사에서 생활해 손이 덜 가지만 주말이면 시내에 있는 학원에 데려다줘야 한다.
“제주 농촌은 초등학교마다 셔틀버스가 다니고 어린이집도 잘 갖춰져 있어 어린아이 키우기는 오히려 도시보다 편해요. 그러나 아이가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인근에 학원이 없어 불편한 점이 많아요.”
오전 8시30분부터는 남편과 함께 체험객 맞을 채비를 한다. 미애수다뜰을 찾는 이는 한해 7000명가량. 재료준비부터 체험장 정돈까지 준비만 3시간은 족히 걸린다. 인근식당을 찾거나 배달음식으로 점심을 빨리 해결하고 정오에는 본격적으로 체험교육을 진행한다.
체험객이 떠나면 오후 3시 무렵이 된다. 이제부터 한시간 동안 남편은 수확한 농산물을 배달하고 강씨는 집안일을 한다. 빨래며 집안청소까지 농사일만큼이나 할 게 많다.
아이들이 하교하는 4시부터는 ‘멀티플레이어’가 된다. 아이들 숙제 봐주고 농산물 포장 작업은 물론 퇴비주기·가지치기 등 농장관리도 해야 한다.
농사일을 마치는 시각은 오후 8시. 그나마 요즘은 빠른 편이다. 한창 바쁠 땐 11시를 넘어서까지 일한다. 몸은 녹초가 됐지만 농사일을 남편에게 전적으로 맡길 순 없다. 잘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농기계 운전 등 남편이 잘하는 부분과 창고정리·영농일지 작성 등 아내가 잘하는 부분이 달라요. 또 남편과 아내가 함께 농사를 지으면 소통할 수 있는 시간과 폭이 훨씬 늘어난다는 것도 장점이죠.”
일주일 중 강씨가 숨 돌릴 수 있는 날은 농산물 공판이 없는 토요일 하루. 그마저도 체험객이 몰리거나 농장에 일거리가 많으면 쉴 수 없다. 못다 한 집안일을 마무리한 자정 즈음에야 강씨는 겨우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