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가까워지니 더 눈에 선해.” 실향민 강신구씨가 북녘과 맞닿은 강원 고성 바닷가 철조망을 붙잡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사진=김덕영 기자
함경남도 떠나온 지 70년…강신구씨의 사무치는 사연 남북정상회담 후 기대감 커져
‘3일 피난’인 줄 알았는데…지울 수 없는 고향의 그리움
“살아생전 북녘땅 한자락이라도…”
“오늘따라 이케 눈물이 나는지 모르갔다.”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손등으로 훔쳐냈지만 빨개진 코끝은 숨길 수 없었다. 가정의 달인 5월이라서 더욱 그런지 몰랐다. 훔치면 다시 차오르고 훔치면 또 번져오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하는 강신구 할아버지(75·강원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리). 얼마 전 남북정상이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에 울컥했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울렁거림이 속 깊은 곳에서 시작되더니 며칠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최대한 북쪽으로 달려와 이곳 북한과 닿아 있는 바닷가 철조망 앞에 섰다.
함경남도가 고향인 그는 일곱살 때 부모님과 함께 피난 왔다. 사흘이면 끝날 줄 알았던 피난살이가 70년에 가까워지는 동안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그는 남쪽에서 일가를 이뤘지만 고향은 여전히 가슴 절절하게 그리운 곳이다. 드디어 고향집 가는 길이 가까워진 것인가. 하지만 섣부른 기대는 실망만 깊게 하는 법. 뜨거워진 마음을 식히느라 강 할아버지는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더 서 있었다.
그래도 차마 놓지 못하는 기대 한자락. ‘고향마을까지는 못 가도 평양에라도 갈 수 있으면, 살아생전 북녘땅 한자락이라도 밟아볼 수 있으면….’
실향민 강신구 할아버지가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일곱살 때 아버지·어머니하고 큰집 형님 한분하고 그렇게 넷이서 피난을 왔거든.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남겨두고. 우리 고향은 함경남도 북창군 신창면이야.”
강신구 할아버지는 실향민 2세대다. 피난 나오던 날 ‘3일 피난’이라고, 어른들이 그랬었다. 그래서 옆집 광자 누나네는 어머니·아버지에 오빠들, 고모들까지 온 가족이 다 피난 내려오면서 고작 쌀 두말 들고 왔다고 했다. 3일이 한달이 되고 1년을 넘기더니 어느새 70년 가까운 긴 세월이 돼버렸다.
“처음에는 강원 삼척으로 갔지. 거서 한 5년 살았는데, 함께 피난 내려온 고향 동네 아저씨가 좀더 북쪽으로, 고향 가까운 데로 가자 그런 거야. 그래야 통일되면 얼른 고향에 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속초로 이사 갔어. 거서 한 5년 살다가 여기 아야진으로 또 이사 왔지. 한발짝이라도 고향에서 더 가까운 곳에 살고 싶으셨던 거지.”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서러움도 깊어졌다. 맨손으로 내려와 땅 한덩어리 없었던 아버지는,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뱃일을 해야 했다. 그나마 바닷가 고향에서 하던 일이라 손에 익었다. 낮 동안 힘든 뱃일로 지친 몸이었지만 밤이 돼도 아버지는 쉬지 못했다. 북에 두고 온 당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느라 밤새 울고 또 울었다.
“맨날 할아버지 얼굴 한번 봐야 하는데, 얼굴 보고 싶은데 하면서 울었어. 같이 피난 온 큰집 형님도 마찬가지였지. 형님은 그때 스무살쯤이었는데, 부모님 다 두고 혼자 왔으니까. 술 한잔 들어가면 항상 울었지. 한 10년은 그렇게 두 양반이 서럽게도 울었어.”
결국 두분 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전쟁통에 고향을 등진 실향민 1세대들 대부분이 그랬다. 아직 생존해 있는 분들도 나이가 너무 많아 거동이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동네에 104세 되신 할아버지가 한분 계셔. 함경도 분이야. 젊어서는 고향 그리워하면서 많이 울고 그랬을 텐데, 지금은 덤덤해. 이제 당신 나이가 그만큼이면 고향 부모님도 돌아가셨을 테니 다 부질없다는 거지. 사실 나는 너무 어릴 때 피난 와서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 우리 집 싸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할머니가 웃는 얼굴로 맞아주시던 그 한 장면이 남아 있지. 아, 집 앞 바닷가에 피어 있던 해당화도 기억난다. 딱 이맘때 피었는데, 빨간 꽃이 참 예뻤는데….”
70여년이라는 시간이 고향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서서히 지워낸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힘센 시간도 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강 할아버지의 가슴에서 고향을 지워내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남북회담 했잖아. 텔레비전으로 두 정상이 손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넘어오는 장면을 보는데, 울컥하더라고. 별생각이 다 들었지. ‘정말 통일이 되려나보다. 아버지는 좀 오래 사시지 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나’ 하고 말야. 나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데도 이렇게 뭉클한 거야. 아마 아버지의 회한이 안타까워서 그랬겠지만 또 생각해보면 고향이라는 말은, 고향은 참 묘한 힘을 가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