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학계의 음식 연구는 식품학·영양학·조리학에 집중돼 있었다. 근래 들어 미시사(微視史)의 한 갈래로 음식의 기원과 역사, 변천을 다루는 음식사(飮食史)가 정립됐다. 또 사회학·문화인류학 분야에서 음식의 사회적 수용과 문화적 함의 등을 논구하는 저작이 다수 나오면서 음식학(飮食學) 범주가 넓어졌다. 하지만 음식의 유래와 발생 시기, 창시자 등을 정확하게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음식은 문자 발생 이전 저 멀리 인류 출현과 동시에 시작됐고, 공동체의 집단적 지혜와 경험으로 진화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의 기원을 말할 땐 흔히 스토리텔링으로 접근한다.
으슬으슬 몸이 움츠러드는 계절에 생각나는 뜨끈한 청국장의 기원도 그러하다. 청국장은 전쟁 때 단기숙성으로 빨리 먹을 수 있게 만든 장이라 해서 전국장(戰國醬), 또는 청나라에서 배워왔다고 해서 청국장(淸國醬)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전국(戰國)과 장(醬)의 결합은 어의적으로 어색하기 때문에 청국장은 청나라와 연관됐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100여년 뒤인 1760년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에서 청국장 만드는 법이 처음 소개된 것을 보더라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흘러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전도 그렇지만 과거의 전쟁은 병참물자, 그중에서도 군량·보급품 조달 및 수송과 군사들의 식사문제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중국 봉건국가의 군사들은 전쟁하면서도 주둔지에서 직접 농사지어 군량을 확보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아시아·유럽을 휩쓸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햇볕에 말려 안장 밑에 깔아 가져온 양고기 육포와 타고 다니던 말의 젖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 덕분에 전쟁터에서도 쉽게 식사를 해결해 기동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들은 콩을 삶아 말린 후 전대에 넣고 다니며 끼니 대용으로 먹었다고 한다. 만주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때가 19세기 중반 이후이고, 만주가 콩의 원산지이자 대량 재배지역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수천리 밖 조선땅을 쳐들어온 청군이 비상식량으로 콩을 활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사들의 식사문제로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 민족이 정복전쟁에 쉽게 나설 수 없었던 이유도 그것을 통해 분석해볼 수 있다. 조선왕조 군사 편제 실태를 보면 전투원이 100명이라면 군물(軍物)을 운반하는 군사는 약 3분의 1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투원 100명을 먹이려고 솥단지·곡식·장작·된장·간장 등을 짊어진 군사 30여명이 딸리니 정복전쟁의 요체인 공격력과 기동력이 어떻게 발휘될 수 있겠는가.
요즘은 콩을 삶아 항아리에 넣은 다음 따뜻한 곳에서 띄워 청국장을 만든다. 하지만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이런 간결한 방법과는 다르게 청국장 제조법을 설명한다. ‘햇콩 한말을 가려서 삶은 뒤 가마니 등에 쟁이고 온돌에서 3일간 띄운다. 여기에 실(絲)이 생기면 따로 콩 다섯되를 볶아 껍질을 벗겨 가루를 내서 섞고 이를 소금물에 넣어 절구로 찧는다. 때때로 맛을 보며 소금을 가감한다. 너무 짜면 다시 꺼내 오이·동아·무 등을 사이사이에 넣고 주둥이를 봉해 장독을 묻는다. 7일이 지나면 먹어도 된다.’
중국에는 청국장과 비슷한 것이 없다. 일본의 나또는 제조법과 형태·냄새 등이 우리의 청국장과 아주 비슷하다. 단지 청국장은 삶은 콩을 따뜻한 곳에서 자연 상태로 발효시키고, 나또는 삶은 콩에 나또균(枯草菌·고초균)을 넣어 발효시킨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 청국장은 끓여 먹지만 나또는 그대로 먹는다. 일부에서는 청국장과 담북장을 혼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담북장은 항아리에 미지근한 물과 메줏가루·고춧가루를 잘박하게 섞어 따뜻한 곳에서 일주일쯤 띄우는, 청국장과는 다른 우리 고유의 단기숙성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