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유 재고의 주범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유럽연합(EU)·미국과 맺은 FTA가 2011·2012년 연이어 발효되면서 유제품 수입이 4년 새 53만3000t이나 늘었다. 대부분 무관세 쿼터다. 우리 낙농가들이 손 놓고 바라만 본 것은 아니다. 원유값 동결, 마이너스 쿼터제 도입, 젖소 자율도태 같은 자구책 마련에 나섰지만, 수입 공세를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올 상반기 치즈·유장 수입량은 1년 전보다 각각 23.5%와 17.6% 증가했고, 3월 기준 국내 우유 재고량은 1974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많은 28만1000t에 이르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앞으로 10년 동안 젖소 사육마릿수가 5만마리 줄 것으로 전망했다.
한·칠레 FTA를 시작으로 주요 FTA가 뿌리를 내리면서 국내 농업의 구조조정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관세 인하·철폐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안정적인 수입구조까지 갖춰지면서 값싼 수입 농축산물이 물밀 듯 쏟아지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육우 사육마릿수는 2010년 16만마리에서 2014년에는 8만9000마리로 절반가량 줄었다. 가격경쟁력이 워낙 취약해 수입 쇠고기와의 직접 경쟁이 힘겨운 탓이다. 수입 쇠고기시장의 90%를 점유하는 미국·호주산 쇠고기 관세(기본 40%)는 매년 2.7%포인트씩 내려가다 2026년과 2028년 철폐된다.
FTA 파고를 가장 먼저 맞닥뜨린 포도는 구조조정 여파로 재배면적이 2000년 2만9200㏊에서 2014년 1만6300㏊로 쪼그라들었다. 특히 농가 재배의지 지표인 유목(어린나무) 면적은 6000㏊에서 2300㏊로 급감했다. 농가들이 포도산업의 미래를 어둡게 본 탓이다.
수입업자들은 낮은 관세가 적용되는 마지막 달인 4월에 대량 수입해뒀다 5~6월에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 이 때문에 5월부터 출하하는 시설포도 농가가 직격탄을 맞았다. 올 6월 기준 국내산 <캠벨얼리> 도매가격은 상품 2㎏이 9557원으로 평년의 1만4114원과 견줘 4557원(32.3%) 하락했고, <거봉>은 1만8111원에서 1만6514원으로 떨어졌다. 포도 관세는 2014년 칠레산이 완전히 철폐됐고, 내년부터는 미국·페루산마저 무관세로 수입된다.
포도에 이어 체리·망고·자몽 같은 봄철 과일 수입이 늘면서 딸기·토마토·참외 같은 과채류 농가들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다. 농경연에 따르면 수입 체리는 국내산 포도·참외 소비에 영향을 미치고, 수입 포도는 국내산 포도는 물론 참외·수박 소비를 대체한다. 또 겨울철 오렌지·바나나 수입은 겨울철 국내산 배 소비 감소를 불러왔다.
농경연 관계자는 “포도 수입이 10% 늘어나면 국내산 참외 가격은 1.03% 떨어지는 등 이종 과일 간 대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최근 10년간 과일 수입 증가 여파로 국내산 과채류와 과일류 소비 비중이 5~10%포인트 줄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FTA 영향권에서 벗어났던 채소농가도 중국·베트남과의 FTA로 수입농산물과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할 것으로 우려된다. 이미 고추시장은 중국산이 절반을 잠식했고, 마늘·양파 같은 양념채소류 재배의향도 뚝 떨어지면서 부족분을 외국산으로 채워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수입 먹거리가 국내시장을 잠식하는 상황이 심화되면서 10년 후 농축산물 수입액이 2013년 국내 농업생산액(46조6480억원)의 75% 수준인 317억달러(약 35조원)에 이를 전망”이라며 “농업의 근본적인 체질을 개선하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미래성장산업화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