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은 과잉, 북한은 부족=정부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권고에 따라 햅쌀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국민의 두달치 쌀 소비분(72만t)을 창고에 보관하는 수급정책을 유지해왔다. 2000년대 들어 수확기 직전(양곡연도 말)의 정부재고는 2010~2011년을 제외하고는 70만~90만t의 적정선이 지켜졌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대북 쌀 지원이 장기간 중단되고 연이은 풍작으로 정부가 추가 격리에 나서면서 정부 재고가 급증했다. 또 연간 30만t씩 반입되는 가공용 수입쌀도 대부분 재고로 쌓였다. 이에 따라 올 수확기 직전의 정부 재고는 적정량의 두배가량인 135만2000t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올해 쌀 생산량이 수요량보다 50만t가량 웃돌 것으로 전망되지만, 정부가 추가 격리에 나설 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가 수확기에 공공비축과 해외공여용으로 39만t을 사들이면 정부재고는 포화상태인 170만t을 웃돌게 된다. 양정당국은 사료용 특별처분, 사회복지용 지원 확대, 주정용·가공용 공급 확대를 모색하지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사료용 처분은 국민 정서상 추진이 여의치 않고, 다른 방안은 기존 처분량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쌀 재고로 몸살을 앓는 남한과 달리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FAO는 올해 북한의 쌀 생산량을 봄부터 이어진 가뭄으로 지난해보다 12% 감소한 230만t으로 추정하고, 외부로부터 쌀·밀·감자·옥수수를 합해 540만t의 수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북 지원 없인 재고 해결 어려워=최근 5년(2010~2014년) 평균 우리나라 쌀 생산량은 420만t으로 과거 10년(2000~2009년) 평균 488만t보다 68만t 적다. 그런데도 재고 문제가 오히려 심각한 이유는 대북 쌀 지원을 중단한 데 따른 영향이 가장 컸다. 연간 40만t에 이르던 소비처가 사라지면서 정부재고가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농업계는 물론 양정당국도 쌀 재고 특별대책 중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대북 지원을 꼽고 있다. 임병희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 사무총장은 “대북 쌀 지원을 정례화하지 않으면 매년 공급과잉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며 “대북 쌀 지원 추진 과정에 많은 시일이 소요되는 만큼 하루속히 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차관 형식의 쌀 지원 절차는 ‘유관국과의 사전협의→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협의→국회 사전보고→남북교류추진협의회 의결→남북 간 차관계약서 체결→남한 내 업무위탁(통일부→농림축산식품부→aT)→도정→수송·인도’란 복잡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 정부 차원의 대규모 쌀 지원이 마지막으로 이뤄졌던 2007년에는 남북경제협력추진협의회 개최(4월)부터 실제 쌀 지원이 완료(9월)될 때까지 5개월이 걸렸다.
다만 수확기를 앞두고 쌀 지원 결정이라도 이뤄지면 산지 쌀값 안정에 긍정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
◆재정 부담 크지 않아=대북 쌀 지원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국내산 쌀 10만t을 지원하는 데는 쌀값에 도정비·운송비를 더해 1900억원이 든다. 외국쌀은 태국산 장립종을 기준으로 520억원 정도다. 40만t을 지원한다면 최소 2080억원에서 최대 7600억원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대북 쌀 지원은 재정적으로 정부에 적잖은 부수효과를 안겨준다. 우선 보관비용이 절감된다. 정부가 국내산 쌀 10만t을 보관·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미질 하락분과 창고 임대료, 금융비용, 보관보험료를 더해 연간 320억원 정도다. 정부 재고에서 40만t이 빠지면 연간 1280억원(320억원×4)을 아낄 수 있다. 재고를 계속해서 끌고 가기보다는 조금씩이라도 털고 가는 게 정부로서는 훨씬 유리하다.
직불금도 줄일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쌀 40만t을 북한에 지원하면 국내산 쌀값이 80㎏ 한가마당 7000~8000원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수확기 쌀값이 1000원 떨어질 때마다 쌀 변동직불금이 400억원 늘어나기 때문에 최대 3200억원(400억원×8)을 절약할 수 있다. 이 밖에 ▲수확기 보관창고 부족 문제 해소 ▲도정공장 운영 활성화 ▲국내산 산지 쌀값 안정과 같은 간접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남북관계가 관건=대북 쌀 지원은 남북한의 정치적 관계에 따라 결정돼 왔다. 이산가족상봉이 10월 열리는 등 천안함 사태 이후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최근 개선되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정부는 대북 쌀 지원 재개 요구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북한이 8·25 합의를 통해 교류 활성화를 약속했지만, 이후 보여준 행동을 볼 때 북한의 진정성을 의문시하는 게 정부 내 분위기”라고 전했다.
관건은 올해 70주년을 맞는 북한 노동당 창건일(10월10일)이다. 북한은 이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것임을 시사했다. 미사일이 발사되면 남북관계가 틀어지면서 당분간 쌀 지원을 비롯한 정부 차원의 물자 교류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대북지원이 이뤄지더라도 퍼주기 논란을 잠재울 북한 내 분배의 투명성 확보도 과제다. 쌀을 북한에 지원하면 실제 북한주민에게 지원되기보다는 군수용 등으로 쓰일 것이란 우려가 상존하기 때문이다. 농식품부의 한 관계자는 “쌀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에는 공감하지만, 단순히 국내 수급 해소용으로 쌀을 지원하기는 어려운 여건”이라며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