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쌀값 하락세가 계속되면서 지난해 수확기 벼를 대거 사들인 미곡종합처리장(RPC)의 경영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쌀 판매가격이 벼 매입 원가를 밑돌아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양곡업계는 이런 추세가 단경기(7~9월)까지 이어지면 올해 농협RPC 적자가 2010년의 1077억원을 웃돌면서 도산하는 RPC가 속출할 것으로 우려한다.
농림축산식품부와 양곡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수확기(10~12월) 농협RPC(이하 비RPC 농협 물량 포함)가 사들인 벼는 177만t(이하 쌀 환산 기준)에 이른다. 이는 전체 생산량 433만t의 41%에 달하는 양이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농협 역사상 2015년 수확기가 가장 많은 벼를 사들인 해로 기록될 것”이라며 “이 때문에 농협의 쌀 재고는 1년 전보다 7%가량 많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새해 들어서도 쌀값 하락세가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조사한 1월 평균 쌀 도매가격은 상품 20㎏이 3만6200원이다. 2011년 2월 이후 4년 11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시중 유통물량이 워낙 많은 탓이다.
전망도 어둡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올 단경기 산지 쌀값을 80㎏ 한가마당 14만3000원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수확기의 15만2158원에 견줘 6% 낮은 수준이다.
이 때문에 올해 영세 RPC가 대거 쓰러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07년 이후 농협RPC 손익은 계절진폭(단경기 쌀값이 전년 수확기보다 높게 형성되는 현상)과 비례해 왔다. 가장 적자가 컸던 해는 2010년이다. 2009년 대풍 여파로 2010년 단경기 쌀값은 수확기에 견줘 7.9% 떨어졌고, 그해 농협RPC는 개소당 6억8200만원씩 모두 1077억원의 적자를 봤다. 이 여파로 다음해 자금력이 약한 민간RPC 18곳이 문을 닫았고, 농협RPC 4곳은 다른 RPC에 흡수되거나 통합됐다.
올해는 2010년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2009년 대풍 당시 정부는 평년보다 더 생산된 물량 34만t을 모두 격리했지만, 2015년에는 잉여 생산량 35만7000t 중 20만t만 격리했다. 또 2015년 쌀 생산량이 2009년에 견줘 60만t 줄었지만, 농협RPC 매입량은 오히려 30만t 가까이 늘었다. 농협RPC의 부담과 위험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다.
적자를 우려한 산지에선 재고 줄이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본지가 산지 농협RPC의 재고·판매 실태를 파악한 결과 대부분이 수확기 때 매입한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쌀을 판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2년 연속 역계절진폭을 경험한 산지에서 밀어내기식 출하에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가 시중 재고 중 일부를 격리하는 방법으로 수급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문병완 농협RPC운영 전국협의회장(전남 보성농협 조합장)은 “쌀값이 계속해서 떨어지면서 벼를 대거 사들였던 농협RPC는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며 “농협이 쌀 소비 촉진에 나서고 있지만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도 팔짱만 끼고 있을 게 아니라 잉여 유통물량을 하루빨리 시장에서 격리해 RPC 숨통을 터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태억·김상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