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31일 경기 과천의 농림수산식품부 기자실. 전날 취임한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첫 기자회견을 쌀 수급 문제에 전부 할애했다. 2년 연속 대풍이 예고되면서 80㎏ 산지 쌀값이 13만원으로 급락했기 때문이다. 회견에서 유 장관은 수요량을 초과해서 생산되는 쌀을 전량 격리한다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수확기 대책을 내놨다. 그는 회견 직후 “지금처럼 일회성 대책을 세워 대응하는 방식에서 탈피한 ‘쌀산업 발전 5개년 종합대책’을 세우라”고 실무진에 지시했다.
이듬해 농식품부는 ‘수확기 쌀 자동격리제’를 뼈대로 한 종합대책을 마련했지만, 이 대책은 빛을 보지 못했다. ‘시장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예산당국의 반대 때문이다. 양곡 전문가들은 올해처럼 풍년이 예고된 상황에서 선제적인 수확기 쌀시장 안정대책으로 자동격리제 만한 게 없다며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수확기 쌀 자동격리제란=수확기에 앞서 적정 생산량이나 소비량을 산정한 뒤 그 이상의 쌀이 생산되면 초과 물량을 시장에서 자동으로 격리하는 제도다.
예컨대 내년도 국내산 쌀 수요량이 400만t이고 소비량지수가 102%인 상황에서 430만t이 생산되면 400만t의 102%인 408만t만 시장에 유통시키고 나머지 22만t은 수확기에 전부 격리하는 식이다. 수요량을 조금 웃도는 물량은 시장에서 해결하도록 놔두고 일정 지수를 초과하는 물량은 격리하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선제대책이다.
시중에 풀릴 쌀이 사전에 결정되기 때문에 풍년이라고 해서 쌀값이 급락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 미곡종합처리장(RPC)·정미소 같은 산지유통업체들은 매입량과 유통량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사업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격리지수는 소비량 외에도 평년작(최근 5년 중 최대·최저치를 뺀 평균 생산량), 수확기 평균 쌀값을 사용할 수 있다. 또 쌀값이 불안할 때는 격리지수를 100~101%로 비교적 낮게 설정하고, 반대의 상황에서는 103% 이상으로 탄력적으로 운용해서 쌀값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왜 필요한가=2010년 이후 정부는 쌀 수급이 과잉을 보일 때마다 시장격리로 급한 불을 꺼왔다. 한해 공공비축을 제외한 추가격리 물량이 60만t을 웃돈 적도 있다. 그렇지만 시장격리가 늦게 이뤄지면서 격리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지난해 쌀 생산량은 432만7000t으로 정부가 추산한 신곡 수요량 397만t보다 35만7000t 많았다. 수확기 쌀값이 뚝뚝 떨어지면서 격리 요구가 거세지자 양정당국은 20만t을 격리한다는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산지 쌀값은 수확기가 끝난 새해 들어서도 계속해서 하락했고, 추가격리 요구는 더욱 커졌다. 결국 올해 2월 당정은 나머지 잉여물량 15만7000t을 격리한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쌀값은 뚝 떨어진 뒤였다. 정부로선 잉여물량 35만7000t을 전부 격리하고도 쌀값 안정 효과를 얻지 못한 셈이다.
이에 반해 자동격리제는 수확기 쌀시장 안정은 물론 쌀값 안정으로 변동직불금 같은 정부 지출을 줄일 수 있다.
◆난관은=관건은 격리 비용이다. 격리한 쌀이 나중에 밥쌀로 시중에 풀린다면 격리 효과는 반감된다. 따라서 격리 쌀을 가공업체에 저가로 공급해야 한다는 게 농식품부의 판단이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농업계는 시장격리와 가공용 공급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당분간은 정부가 부담하고 장기적으로는 쌀 의무자조금으로 메울 것을 바라고 있다. 임병희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 사무총장은 “2018년까지는 쌀 생산량이 수요량을 크게 웃돌 것이란 게 정부의 판단”이라며 “따라서 농가나 산지 벼 매입 주체들이 예측 가능하면서 불안감을 갖지 않도록 (쌀 의무자조금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한시적으로 자동격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태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곡물실장은 “2010년 이후 정부는 농업계와 정치권의 요구에 마지못해 잉여생산량을 거의 다 격리했지만, 격리시기가 늦어 쌀값을 안정시키는 데 대부분 실패했다”며 “임기응변식의 추가격리보다는 자동격리제처럼 시장 참여자가 예측 가능하도록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영 기자 supply@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