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양파 경매장에 가득 쌓인 중국산 양파.
양파 재배농가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산지 형편이나 작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중·장기 대책을 세우지 않고 단기 시장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해 수입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움직임 때문이다.
양파 재배농민들은 특히 조생종 양파값이 형성되는 시기에 TRQ 물량을 푸는 바람에 밭떼기거래를 앞두고 있는 중·만생종 가격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양파 TRQ 증량=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TRQ 물량을 기본 2만1000t에다 5만t을 더해 7만1000t을 운용하기로 했다. 농식품부는 이중 8000t을 우선 들여오기로 하고 3일 업체를 배정한데 이어 14일까지 도입을 완료할 계획이다. 양허관세율은 정상관세(135%)의 37% 수준인 50%이며, 업체당 배정 한도 물량은 200t이다.
TRQ 조기 운용은 최근 양파값이 크게 상승한 탓이라는 게 농식품부의 설명이다. 4월 상순 도매가격이 1㎏당 1440원까지 올라 양파 위기단계별 수급조절 매뉴얼상 상승기 ‘경계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1㎏당 1440원은 지난해 같은 때와 견줘 12%가량 낮고, 평년보다 39% 높은 수준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재고량·생산량·수입량을 고려할 경우 수급여건이 불안해 수급조절 매뉴얼상 양파 경계경보를 발령하고, TRQ 8000t을 조기 운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만생종이 본격 출하되는 5월 중·하순께 수급 및 가격동향을 파악해 위기단계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TRQ 운용에 가격 급락=정부가 TRQ 물량을 운용할 것이라는 소식이 시장에 전해지고 나서 가격은 급락세다.
이미 3월 말부터 TRQ 물량이 풀릴 것이라는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하락 조짐이 나타났다. 상승세에 있던 양파값이 하락세로 돌아섰을 뿐 아니라 하락폭도 상당했다.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3월28일 국산 양파는 상품 1㎏당 1865원에 거래됐지만 다음날부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6일 정부 발표 이후 10일 양파값은 1184원에 형성됐다. 2주 만에 가격이 681원(37%)이나 내려앉은 것이다.
이같은 가격 하락은 TRQ 영향이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라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하상우 농협가락공판장 경매사는 “TRQ 물량 8000t이 풀린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수입 저장 양파 출하량이 부쩍 늘었다”며 “국산 저장 양파도 아직 출하되는 터라 늘어난 물량이 가격을 끌어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14일까지 들어올 예정인 TRQ 물량은 출하시기 조절로 언제든 시장에 풀릴 수 있어 양파값 상승을 억제할 소지가 다분하다.
가락시장 한 도매법인 관계자는 “국산 햇양파는 특성상 저장이 어렵지만 TRQ 물량은 출하시기 조절이 가능하다”며 “앞으로도 TRQ 물량이 가격 하락을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향후 시세도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유승철 가락시장 동화청과 경매사는 “시기가 지날수록 가격이 더 내려갈 것을 우려해 조기출하가 느는 추세”라며 “햇양파 출하지역이 늘어나면 가격은 더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TRQ 조기 운용 ‘문제 있어’=농가들은 정부가 너무 빨리 양파 수급상황을 예단해 TRQ를 운용한다고 비판한다. 인건비를 비롯한 각종 자재값이 올라 생산비가 크게 뛰는 농촌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시장가격만 바라보면서 TRQ 물량을 들여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특히 지난해 4월 상순 가격이 1㎏당 1641원에 형성되다가 중·하순 864원까지 폭락했을 정도로 수확기 기상여건에 따라 양파 생산량과 가격이 급변할 수 있다는 것이 농가들의 주장이다. 중·만생종 출하 때까지 수급상황을 좀더 지켜보고 나서 TRQ 물량을 풀어도 늦지 않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2만6446㎡(8000평)에 양파농사를 짓는 박창호씨(73·제주시 한경면)는 “지금 같은 수급정책은 저장업자와 수입업자만 배를 불리는 것으로, 생산 농민은 안중에도 없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단경기인 2~3월에 손놓고 있던 정부가 정작 햇양파를 본격 출하하는 시기가 되면 외국산 양파를 시장에 풀어 값을 끌어내리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담겨 있다.
그는 이어 “하루 일당이 지난해보다 5000원씩 오른 7만5000~8만원에 이르지만 그마저 일손 구하기도 어렵다”며 “본격 출하철마다 수입물량을 방출해 값을 끌어내리는 행태가 올해로 3년째 이어져 이제 양파농사를 접어야 할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전영남 (사)한국양파산업연합회장(전남서남부채소농협 조합장)은 “농촌이 고령화해 자가노동력이 거의 없는 실정이고 인건비는 해마다 올라 양파를 심는 농가가 매년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실정은 뒤로하고 정부가 양파값 잡겠다고 수입에만 열을 올리면 국내 생산기반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창철 제주 서귀포 대정농협 조합장은 “정부가 수급조절을 외국산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국내산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선행해야 한다”며 “TRQ 물량 운용에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성홍기·김동욱 기자, 제주=장수옥 기자 sojang@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