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식재료 양파. 생으로 먹고, 볶아먹고, 삶아먹고, 장아찌도 만들어 먹고…. 허다한 방법으로 수없이 먹는 양파를 보러 주산지 전남 무안으로 가는 길에 강레오 셰프가 말을 이었다. 양파에는 매운맛, 시원한 맛, 아삭한 맛 등 다양한 맛이 들어 있다, 양파를 오래 볶으면 단맛이 진해진다, 양파에는 보다 깊고 복잡한 감칠맛이 있다…. 밭에 도착하면 양파의 진정한 감칠맛을 보여주겠다는 강 셰프를 앞세우고 몽탄면 다산리로 향했다.
사실 양파는 어떤 식재료와도 잘 어울리고, 어지간한 요리에는 빠지지 않는 감초 같은 채소다. 심지어 살짝 볶기만 해도 아삭하고 달콤한 맛이 올라오는 것이 특별한 조리법 따위는 필요치 않는, 천하 제일의 식재료가 아닌가. 소위 ‘요리 불능자’도 쉽게 조리할 수 있는 친근한 재료가 양파다. 그런데 양파에는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양파 단독으로는 요리를 완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연이 되지 못하는, 만년 조연 신세인 것이다.
그래서 강 셰프에게 물었다.
“양파가 주인공인 음식이 있긴 한가요?”
●주인공 같은 조연
“양파수프 있잖아요.”
아, 양파수프!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서양에서는 흔히 먹는 음식이다. 탁한 국물에 갈색으로 변한 흐물흐물한 양파가 둥둥 떠다니는 겉모습만 보고 이상한 맛일 거라 지레짐작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달콤한 맛이 일품인 요리다.
“잘게 채썬 양파를 팬에 볶는데, 전체적으로 갈색이 나도록 충분히 오랫동안 볶아야 해요. 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요. 여기에 닭육수를 붓고 간을 하면 양파수프가 완성됩니다. 빵을 곁들여 먹으면 맛있어요.”
요리법이 워낙 간단해서 집에서 누구나 해먹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강 셰프가 웃는다. 양파를 갈색으로 볶는 일이 어렵진 않은데 생각보다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라고. 3~4인 가족이 먹을 수프를 만들려면 양파만 20분 넘게 볶아야 한단다.
“그래도 만들어놓으면 맛있기는 하죠. 좋은 양파를 잘 볶으면 닭육수 없이 소금으로만 간해도 맛있는 양파수프를 완성할 수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양파수프는 양식 코스요리 중 메인요리 전에 나오는 일종의 전채요리다. 양파수프만으로는 한끼 식사가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양파는 주인공이 아닌 조연인 셈 아닌가. 슬쩍 물었는데 강 셰프의 답이 명쾌하다.
“주인공 같은 조연이죠. 양파가 없으면 그 깊고 풍부한 맛이 나겠어요?”
내친김에 강 셰프는 양파가 얼마나 맛있는 식재료인지에 대해 줄줄이 쏟아놓는다. 양파수프가 낯설다면 잘 볶은 양파에 토마토를 썰어넣고 끓여 채소수프를 만들어보란다. 양파와 토마토의 감칠맛이 만나서 정말 풍부한 맛의 수프가 완성되는데, 청양고추까지 송송 썰어넣으면 매콤한 향이 도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딱 좋아할 만한 요리가 된다고.
양파 장아찌를 좋아하지만 장을 끓여서 붓고 식히고 하는 과정이 번거로워 안 만들어 먹는 사람들을 위한 처방도 있다. 적당한 크기로 썬 양파를 기름을 약간 두른 팬에 볶다가 간장·물·설탕·식초 등을 섞어 준비해둔 장을 넣고 끓이면 된단다. 장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면 불을 끄고 그릇에 옮겨담아 식히면 완성이다.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꺼내 먹어도 되지만, 그날 바로 먹어도 담근 지 며칠 된 장아찌 같은 깊은 맛을 낸단다.
●뭘 해도 맛있는 양파
양파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보니 어느새 무안이다. 부친의 뒤를 이어 양파농사를 짓고 있는 젊은 농민 김영상씨(26)를 만나 양파밭을 안내받았다. 스테비아를 이용해 고품질 양파를 생산하고 있다는 그는 올 가뭄이 심해 양파가 잘 자라지 않아 전반적으로 구가 작아져 걱정이란다.
설명이 끝나자 강 셰프가 바통 넘겨받듯 질문을 이어갔다. 양파의 생육 주기가 어떻게 되는지, 양파를 어떻게 저장하는지, 스테비아를 사용하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등 잇단 질문에 김씨도 진지하게 답했다. 기온이 25~30℃에 달하면 줄기가 쓰러지는데 그때부터 양파 표면에 붉은 껍질이 생기기 시작한단다. 수확을 끝낸 양파는 밭에서 일주일가량 말린 뒤 저온저장고에 저장했다가 출하할 때마다 포장한다고. 스테비아는 땅심을 좋게 하고 양파의 당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김씨가 불쑥 고민 하나를 털어놓는다. 밭 근처에 무궁화호 기차가 서는 기차역이 있는데 주말이면 사람들이 꽤 내린단다. 근처에 있는 호담 항공우주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양파를 알릴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도통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어니언링, 양파튀김 만들어서 팔아요!”
김씨의 오랜 고민이 무색하게 강 셰프가 금세 답을 내놓는다. 항공우주전시관 손님으로는 어린이들이 많을 터. 주변에 별다른 관광지가 없는 것을 볼 때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을 테니 간단하고 맛있는 간식을 파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양파맛도 알리고, 양파도 팔고 좋잖아요. 제가 레시피 알려드릴게요.”
두 사람이 악수하는 걸로 순식간에 ‘협정’이 체결됐다. 그런데 양파튀김은 그렇다 치고, 감칠맛은 언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강 셰프에게 눈치를 주자 양파밭 옆 정자에서 요리를 시작한다. ‘리오네이즈’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식 양파볶음이다.
채썬 양파를 약불에 오랫동안 볶는데 색이 변하지 않으면서 아삭함도 살아 있게 볶는 것이 핵심이란다. 스테이크에 곁들여 먹는 음식인데, 양파볶음만 먹어도 맛있다고. 꽤 시간이 지나고, 계속 이어지던 양파 볶기가 드디어 끝나자 스테이크를 굽는 것은 순식간이다. 후다닥 구워낸 스테이크에 양파볶음을 곁들여 먹으니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것이 감칠맛 ‘끝판왕’이다. 강 셰프의 장담이 빈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