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나 60대에게 ‘백제(百濟)’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계백의 황산벌전투나 낙화암 삼천궁녀가 아닐까? 물론 일본과 신라에 전해진 백제문화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패망한 나라’ 백제의 이야기들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이제 백제문화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현대에 와서 더 자랑스러운 ‘백제문화’
백제문화는 1500년 전 과거의 문화지만, 그 특성을 보면 오히려 현대에 더 적합한 가치와 품격이 내재돼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백제문화는 자연과 예술의 조화, 그리고 개방과 선진, 글로벌 문화, 문화예술 측면에서 현대에 더욱 자랑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영토는 강과 바다에 잇닿은 곳이다. 따라서 백제는 농경문화와 그에 따른 경제적 풍요를 기반으로 발달했다. 이를 토대로 백제문화는 다양하면서도 섬세함이 곁들여진 자연과 예술의 조화를 보여준다. 백제 토기의 온화한 모습, 화려하지 않으면서 격조와 조화를 보이는 연꽃무늬 기와,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의 고졸한 미소 등이 바로 그런 모습들이다. 그래서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문화’라는 백제문화에 대한 평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백제는 개방성과 다양성의 측면에서 삼국 가운데 가장 활발한 국제교류를 통해 문화의 수용과 교류·전파를 이룬 글로벌 국가였다.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는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 그 지정가치와 의미를 “공주·부여·익산은 475~660년 삼국시대 백제의 왕도(王都) 또는 왕성(王城)이 있던 곳으로, 이 지역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들은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고대 왕국간 상호 교류로 이룩된 백제의 건축기술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또한 수도의 입지 선정, 불교 사찰과 고분, 석탑의 배치 등을 통해 백제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로 정의했다.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
또 백제는 바다와 강이라는 열린 창구를 통해 문화의 수용과 교류, 전파를 이룬 글로벌 국가였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삼국 가운데 개방성과 다양성의 측면에서 가장 특이했으며, 중국 남조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이를 꽃피웠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 존재했던 고대 동아시아 왕국간에 진행된 활발한 교류를 보여줘 인류 문명사적 가치도 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