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농민신문

[할매 할배 이야기] 조기창 할아버지<전남 곡성> 고장나면 손수 고쳐가며 50년 동안 농사일 같이해 팔려고 내놨더니 고물 취급…정 듬뿍 들어 이젠 못 팔아 “저그 저 길가에 섰는 거이 나(내) 경운기여. 한 오십년 썼네. 인자 나가 농사를 안 진게 저러고 섰네.”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된 7월 어느 날. 조기창 할아버지는 전남 곡성군 곡성읍을 가로지르는 ‘앞냇가’ 쉼터에 나와 한낮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올해로 여든셋이 된 할아버지는 몇해 전 ‘실업자’가 됐다. 쌀 팔아 돈 생기면 논 사고, 벼 심어서 돈 벌면 또 논 사고 하다보니 어느새 논이 ‘스무마지기(약 4000평)’나 됐지만 세월에는 장사 없었다. 늙은 몸이 농사일을 버티지 못해서 그만둔 것이다. 할아버지가 농사를 그만두자 덩달아 실업자 신세가 된 것이 있었으니, 경운기였다.
“나가 경운기 1기여. 처음으로 나온 경운기를 샀단게. 그때는 경운기를 살라믄 교육을 받아야 했어. 저 경남 진해까지 가서 교육을 받았어. 도에서 경운기 산다고 지원한 사람을 추첨해갖고 한데 태워서 데리고 갔지.”
할아버지가 20대 청년일 때 이야기다. 자동차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운전면허 없는 사람이 더 많았던 시절이니 업체가 경운기를 팔면서 운전교육도 함께 시켰던 거란다.
“운동장이 넓드만. 강사가 1단으로 하라고 하믄 구라치(클러치)를 요리 잡고 요리 탁 댕기고 그래. 근디 스톱흐란디 모르고 그냥 끌고 가다가 브로크(블록)담에 딱 걸려서 게우 서고, 그러고 배웠지. 근디 나중에는 돈만 있으믄 다 사드만.”
다들 소로 밭 갈던 시절. 소보다 훨씬 빨리, 훨씬 쉽게 밭을 잘 갈아주던 경운기는 할아버지의 보물이었다. 고장나면 손수 고쳐가며 애지중지 함께한 세월만 50년, 오랜친구이기도 했다.
“밭만 갈았간디? 저걸로 약도 치고 논에 물도 뿜고 짐도 싣고 다니고, 다 했지.”
그런데 이제 할아버지가 농사일을 멈추면서 경운기도 멈춰 선 것이다.
“저거를 팔라고 내놨드만 고물 취급이라. 게우 10만원 준단디 나가 팔겄는가. 나가 쪼끔이라도 젊었으먼 끌고 나가서 논도 갈고 약도 치고 쓰겄구만.”
집 앞에 세워둔 경운기가 행여 비라도 맞을까 비닐커버까지 꼼꼼히 씌워둔 할아버지. 쓸모가 없어졌지만 ‘정 들어서 못 팔겠다’는 할아버지. 어쩌면 할아버지에게 경운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찬란했던 젊은 날의 증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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