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농민신문
젊은 귀농·귀촌인의 새로운 시도들 사람 모여드는 활기찬 농촌 만든다 10년 전, 충남도농업기술원과 협약해 귀농 매뉴얼을 쓸 때 선후배들을 대상으로 전화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질문 요지는 지금의 삶이 행복한 이유와 앞으로의 탈농 가능성이었다. 그때 질문에 답한 50명 넘는 응답자 중 탈농을 고려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고, 행복의 갈래는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꽃과 함께할 수 있어서’였고 다른 이는 ‘동물을 맘껏 키울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 나머지도 대부분 요즘 말로 하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이유로 들었다.
우리 부부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어서였으니 동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바로 ‘내 맘대로 사는 삶’이라고 답하지 않았을까. 역귀농에 대한 생각은 4년 차에 아내가 들려준 말로 대신하겠다. “농촌에 뼈를 묻을래요.” 당시 아내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느라 호미를 달고 살던 탓에 건초염 수술을 받았음에도 정착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장인어른이 하나뿐인 딸을 서울로 유학 보낸 걸 결혼 5년 만에 끌고 내려왔으니 여태 내색은 없으셨지만, 아마도 필자는 장인어른에게 못마땅한 사위였으리라. 그래도 부모 가까이 사는 자식이 효자이듯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효자 노릇을 하게 됐다. 농작업을 비롯해 때마다 돕고 살펴드렸으니 나름 든든하지 않으셨을까.
홍성에 건강하게 뿌리내린 동료 귀농인들도 우리 못지않았다. 시골살이 초기에 같은 마을에 살았던 한 형님 부부는 귀농 후 복숭아농원을 꾸려 많게는 하루에 수백만원어치 복숭아를 직판했다. 곱상한 외모로 흙과 거리가 멀어보였던 한 후배도 4년 만에 자타가 공인하는 농부로 변신했다.
경제적인 성공과 자립 외에도 우리 지역에는 가치 지향적인 후배들이 많다보니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 한 예로 하천 정비를 위한 행정 설명회에서 민간 측 하천생태 발표가 이어지자 사업 내용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른바 정비를 최소화해 생태자원을 보존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또 최근에는 민간과 행정이 원탁회의를 열어 지역민의 의견을 사안별로 수렴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주민참여 예산제나 행정 모니터링을 넘어 지역의 의제를 긴밀히 협의하는 장을 공동으로 기획한 것이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농촌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홍동 아고라(사람이 모이는 곳 또는 사람들의 모임)로 불러도 좋을 기념비적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귀농·귀촌인들이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필자를 포함한 1세대보다 젊은 후배들이 변화의 주역으로 곳곳에서 의미 있는 시도를 이어가는 것 같아 대견스럽다.
이들은 농업과 농촌을 기반으로 하되 규모화된 영농보다 농교육·생태건축에너지·체험관광 등을 결합해 지역에 새롭고 역동적인 풍경을 선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동네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농사와 목수일과 자전거 수리를 병행하는 귀농인의 모습이 낯설겠지만, 당사자는 일의 조합이 맘에 든단다.
돌아보니 지역에 어지간한 것들은 다 있다. 증명사진이 필요할 때 읍내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영어와 일본어 등 외국어를 배우려 할 때도 면내에서 가능하다. 그밖에 도서관·출판사·카페·만화방·뜸방·반찬가게 등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나누는 곳이 면내라 편하기 그지없다. 여기가 조금 특별한 곳이긴 하지만, 다른 데라고 못할 것도 없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누군가 나서서 지역의 가용 환경과 자원, 지역민의 수요를 파악해 찬찬히 준비해가면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전에 없던 일거리와 설 자리도 만들어지리라 본다.
하반기부터 필자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홍성 서부권에 귀농지원 거점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이른바 서부개척시대를 연 셈이다.
이 일이야말로 농사 외에 잘할 수 있는 일이기에 바쁘고 힘들어도 내년까지는 서부로 향할 작정이다. 
이환의<홍성귀농귀촌지원센터장·전국귀농운동본부 지역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