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사는 주부 한모씨(65)는 최근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북 ‘순창’이라는 국내 지명이 들어간 고추장을 샀는데, 기대와 달리 원료 대부분이 중국산 고추양념이었던 것. 그는 “대기업에서 제조한 데다 고추로 유명한 곳의 지명이 상표에 들어가 있어 당연히 국내산 농산물을 많이 쓸 줄 알았다”면서 “어떻게 보면 얄팍한 눈속임일 수도 있는 이런 업계 관행이 계속되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상표에 국내 지명 넣고 등록해 소비자 현혹=현재 ‘순창’이라는 지명을 상표로 쓰는 고추장 제조업체는 크게 두 곳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이 ‘순창’이라는 지명을 당당히 쓸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해당 지명을 활용해 만든 상표를 등록해놨기 때문이다.
ㄱ회사는 회사명과 지명을 조합해 만든 상표 ‘○○○ 순창’을 2015년 11월 등록했고, ㄴ회사는 ‘순창△’이라는 글자를 이미지에 넣어 2016년 3월 상표 등록을 마쳤다.
두 회사는 상표 바로 밑에 ‘고추장’이라는 명칭을 집어넣어 소비자가 제품을 육안으로 살펴볼 때 ‘순창 고추장’이라고 연결 지어 읽기 쉽도록 꼼수를 부렸다. 이렇게 되면 고추장에 마치 국내산 원료를 많이 사용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커진다는 게 소비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ㄱ회사의 한 고추장 제품은 국내산 청양고춧가루 비율이 채 2%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 재료는 중국산이었다. ㄴ회사의 특정 고추장 제품 역시 대부분 중국산·미국산·호주산 원재료를 쓰는 것으로 드러났다.
상표등록을 주관하는 특허청 관계자는 “업체들이 주로 외국산 원재료로 고추장을 만드는 상황에서 ‘순창’과 ‘고추장’ 두 단어가 제품 앞면에 같이 표기되면 소비자가 상품의 질을 국내산으로 오인할 여지가 있다”면서 “농림축산식품부 등 관련 기관이 이같은 문제를 제기하면 상표법 119조 등에 근거해 쟁송절차를 거친 후 상표등록을 취소시킬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특정 지역명 쓰면서 해당 지역농산물 사용 미미=고추장 제조업체들은 상표에 국내 특정 지역명을 쓰면서 제품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지만, 해당지역 농산물을 구매하는 데는 인색했다. 순창군에 따르면 ㄱ회사는 연간 적게는 15.6t, 많게는 36.6t의 고추를 계약재배 형식으로 사들이고 있다. ㄱ회사의 연간 고추장 생산량 3만t에 비춰 보면 전체 원료 고추의 극히 일부분만 이 지역에서 사들인 셈이다.
ㄴ회사는 아예 순창에서 사들이는 고추가 없었다. 다만 순창의 한 지역농협과 계약을 맺고 고추장에 들어가는 쌀을 연간 200t가량 구매해왔다는 게 회사 마케팅팀 관계자의 설명이다. ㄴ회사의 고추장 연간 생산량(2만t)과 견줘보면 쌀도 극히 일부분만 이곳에서 구입하고 있는 셈이다.
ㄱ회사 홍보 담당자는 “국내산 농산물 수급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순창산 또는 국내산 원재료 사용비중을 높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서 “지금까지 계약재배 방식으로 지역농산물을 지속적으로 구매하고 있고, 지역사회 공헌활동을 펼치면서 지역명을 쓰는 데 따른 이익을 공유한다”고 해명했다.
◆지역명 가치 보호할 제도장치 미약=현행 상표법에 따르면 상표에 지역명을 단독으로만 쓰지 않으면 상표권을 어렵지 않게 따낼 수 있다는 게 특허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강릉과 전혀 연고가 없는 경기도의 한 공장에서 ‘○○강릉 한과’라는 상표를 등록하거나 강원도 원주의 제조업자가 ‘△△해남 고구마과자’와 같은 상표권을 획득하는 게 사안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다. 지명이 포함된 상표를 심사할 때 상품을 제조하는 지역이나 상품의 원재료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서 그렇다.
한 특허컨설팅사의 관계자는 “유럽은 2011년 7월 한·유럽(EU)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후 우리나라에서 프랑스의 지역명 가운데 하나인 ‘샴페인’을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은 예가 있다”며 “우리나라 역시 지역명만으로도 그 제품의 가치를 담보하도록 이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상표법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역명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보호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관리할 주체가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농식품부 식생활소비과의 한 관계자는 “농식품부는 원산지 표시제도, 특허청은 상표권과 지리적표시단체표장권 제도, 공정거래위원회는 식품표시 및 광고에 관한 법령에 따라 업무가 각기 분리돼 있다”면서 “상표에 지역명을 사용하는 데 따른 소비자 오인 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식품 표기 전반을 다룰 컨트롤타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