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보은에 있는 보성 선씨 선영홍 종가의 김정옥 종부. 이 종가에선 술을 담글 때 대추와 솔잎을 넣는다.
충북 보은 ‘보성 선씨’ 선영홍 종가
김정옥 종부, 술 담글 때 미리 손질한 대추·솔잎 넣어 고고한 붉은빛·향긋함 더해
우리밀로 만든 누룩 넣고 발효 일주일 뒤 청주만 떠서 옮겨 담아
추석 차례상에 빠지면 안되는 것이 술이다. 가을 햇살에 잘 익은 햅쌀로 술을 빚어 조상님께 올리는 것은 우리의 오랜 예법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집에서 술을 빚는 일은 줄었지만 차례상에 술을 올리는 일은 변함이 없다. 마침 추석이 코앞이다. 늦기 전에 술 빚기에 나선 종가도 들여다보고, 차례상에 올리면 좋을 전통주도 알아보고, 시판 막걸리 키트로 손쉽게 술 담그는 법도 배워보면서 일찌감치 추석 준비에 나서보자.
“거, 누룩 냄새 구수하니 좋다. 술 참 맛나겠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뒤 말갛게 갠 하늘을 내다보며 툇마루에 나와 앉은 이는 충북 보은에 있는 보성 선씨 선영홍 종가의 김정옥 종부다. 뙤약볕만 면하면 추석에 쓸 ‘술치레’를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어영부영 처서가 지나고 추석이 가까이 와버렸다. 더 늦기 전에 시작하자, 마음먹은 것이 어젯밤이다.
누룩과 찹쌀이 만나 술이 되고
윤기 자르르 흐르는 찹쌀을 가져다가 물에 여러번 씻은 뒤 밤새 불려뒀다. 아침 일찍 마당에 나가 장독대 뒤편에 서 있는 소나무에서 솔잎을 따오고 대추도 깨끗하게 씻어뒀다. 이 종가에서는 술을 담글 때 대추와 솔잎을 넣는다. 대추는 은은하고 고고한 붉은 빛을 내주고 솔잎은 잡균을 없애고 향을 입혀준다.
찜기에 솔잎을 깔고 찹쌀과 대추를 섞어 올린 뒤 불을 켠다. 한 김 올라오면 물을 뿌려가며 찹쌀을 위아래로 뒤섞어주고, 뚜껑을 덮었다가 또 섞기를 반복해 고슬고슬 찹쌀 고두밥을 완성했다. 종부는 잠시 밥이 식는 동안 누룩을 잘게 부수려고 툇마루로 나와 앉은 참이다.
“누룩은 밀로 만들어요. 초여름에 수확한 밀을 거칠게 빻아서 체에 내리면 고운 가루가 걸러지죠. 고운 가루는 따로 모아다가 국수 해 먹고 거친 가루로만 반죽해서 누룩을 빚어요. 예전에 시할머님이 살아계실 적에는 저쪽 행랑방에서 누룩을 띄웠어요. 바닥에 솔잎을 깔고 그 위에 둥글게 빚은 누룩을 올려 말리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문밖까지 구수한 누룩 냄새가 풍겨나왔어요. 그러면 시할머니가 말씀하셨죠. ‘아가, 누룩 뒤집어라.’ 그때는 그 일이 왜 그렇게 하기 싫었는지 몰라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죠.”
예전에는 추석이면 이 넓은 집 방방마다 손님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 손님들에게 새로 빚은 술을 내야 했으니 추석 앞두고 술 빚는 데 찹쌀을 반가마는 써야 했다. 양이 많아 누룩을 깨고 찹쌀과 섞는 일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은 손님도 많지 않고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아 술 빚는 양이 확 줄었지만 말이다. 한창 많이 빚을 때에 비하면 5분의 1도 안된다고.
‘뽀글뽀글’ 온 집에 울리는 술 익는 소리
“누룩을 잘게 빻은 뒤 찹쌀 고두밥하고 섞어주는 거예요. 바닥에 솔잎을 깐 항아리에 누룩과 고두밥 섞은 것을 넣고 물을 부어주면 끝이죠. 이제부터는 누룩이 할 일만 남은 거죠.”
맨 끝방에 항아리를 들여놓는 것으로 일은 끝났다. 3일쯤 지나면 술항아리에서 술 익는 소리가 날 것이다. 뽀글뽀글뽀글뽀글. 밤새도록 시끄럽게 떠들어대다가 어느 순간 잠잠해지면 때가 됐다는 신호다. 일주일쯤 지나면 종부는 항아리를 열고 위쪽의 맑은 술인 청주를 떠내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어둘 것이다. 냉장고에서 숙성된 술은 추석 즈음이면 딱 알맞은 정도로 향긋하고 달콤하게 변해 있을 터였다.
“옛날에는 청주 떠내고 남은 막걸리를 밑술로 해서 다시 술을 담갔어요. 고두밥 대신 찹쌀떡을 만들어서 누룩과 함께 밑술에 넣어주고 발효시키는데, 집안 어른들이 이 술은 아무에게나 주지 않았어요. 그만큼 귀한 술이었죠. 지금은 잘 안 빚지만요.”
첫술은 추석 차례상에 올리고, 사당에도 한 주전자 가지고 가서 절한 뒤 올리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가족 모두 한잔씩 맛도 보고 나면 올 추석도 저물 게다. 남은 술은 냉장고에 고이 모셔뒀다가 손님 오면 내고, 이어 제사상에도 올리고, 달빛 밝은 밤 달에게도 한잔 권하다보면 금세 바닥날 것이다. 그러면 종부는 또 창백하도록 푸르른 하늘 아래 툇마루에 나와 앉아 누룩을 부수고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