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가릴 것 없이 햅쌀로 빚은 송편과 햅쌀로 빚은 술, 박나물·토란국 등으로 한상 차려 조상에게 차례를 올린 후 온 집안과 이웃이 함께 먹고 마시고 즐겼다. 먹을거리가 풍성한 만큼 다양한 민속놀이와 세시풍속도 발달해, 추석이면 고을마다 풍악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소놀이’엔 함께 잘사는 상부상조 정신 담겨
추석 때 행해졌던 세시풍속 중 시대상이 잘 반영된 것으로는 ‘소놀이’와 ‘반보기’를 들 수 있다. ‘소놀이’는 두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멍석을 덮어씌워 소 흉내를 내며 노는 것으로, 농악대는 이 소를 앞세우고 마을의 부잣집이나 그해 농사가 잘된 집을 찾아간다.
농악대가 소춤을 추며 노는 동안 주인은 술과 안주를 한상 차려 내오고, 소놀이패 일행은 해가 질 때까지 마을의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논다. 이 풍습은 마을 부잣집에서 농사일로 고생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한턱내는 것으로, 온 마을이 더불어 잘 살자는 상부상조의 정신이 담겨 있다.
‘반보기’는 시집간 딸이 마음대로 친정나들이를 할 수 없던 시절, 추석을 치른 딸과 친정 식구가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 회포를 푸는 것으로, 중간쯤에서 만난다고 해서 ‘중로상봉’(中路相逢)이라고도 한다. ‘반보기’는 이후 하루 이틀 친정나들이를 하는 ‘온보기’로 발전했는데, ‘근친(친정 부모를 찾아뵙는 것) 길이 으뜸이고 화전(꽃놀이) 길이 버금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친정나들이는 당시 여성들에게는 큰 기쁨이자 희망이었다.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친정나들이가 쉽지 않았지만 추석 때만큼은 예외였던 것이다.
●반나절 친정부모 찾아뵙던 ‘반보기’
하지만 이러한 풍습은 근대화 이후 농경사회가 급격히 쇠퇴하고 도시화가 진전되며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변한 시대에 맞게 새로운 명절 풍속도가 등장했다. 농악대들이 ‘소놀이’를 하던 동네 골목에는 ‘추석맞이 마을 노래자랑’ 현수막이 내걸렸고, 시집간 딸이 ‘반보기’를 위해 나서던 길은 도시에서 몰려오는 차량으로 빼곡히 들어찼다.
근래의 명절 신풍속도 중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은 가히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수 있는 귀성행렬이다. 고만고만한 거리에 흩어져 살던 예전과 달리 수도권과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명절 때마다 도로가 몸살을 앓는 것이다.
고향길이 워낙 힘들다 보니 최근에는 역귀성도 일반화됐다.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자식들을 위해 부모들이 도시로 나들이를 가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경승지의 콘도를 잡아 휴가를 즐기면서 추석날 아침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인터넷 문화의 확산도 명절 풍속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부모님이나 친지들에게 드릴 추석 선물은 대부분 인터넷 주문을 통한 택배로 해결하며, 제수 음식도 전자상거래로 장만한다. 심지어는 인터넷 공간에 차례상을 차려 놓고 컴퓨터를 보며 절을 하는 사이버 차례도 등장했다.
●추석선물·제수음식도 인터넷으로 주문
이렇게 명절 풍속도는 크게 바뀌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여성들의 명절 스트레스다. ‘반보기’를 하던 시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여권이 신장됐으나 명절의 가부장적 문화만큼은 변함이 없어, 차례상 준비는 여전히 여성들의 몫이고 남성들은 그것을 누릴 따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여성들의 스트레스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명절 증후군이라는 신종 질환까지 등장해 ‘명절 증후군 예방법’ ‘명절 스트레스 해소법’ 등이 추석 무렵 각종 매체를 장식하는 단골 소재로 자리 잡았다.
여성들의 명절 증후군에 대해 한창환 서울 강동성심병원 정신과 교수는 “절대 꾀병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아프고 우울증 증상까지 동반하는 스트레스성 질환”이라며 “여성들이 건강한 명절을 보내기 위해서는 남편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명절이 생겨난 것은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도 있지만 산 사람이 즐겁자는 게 더 큰 의미이다. 올해 추석은 연휴가 사흘밖에 안돼 명절 스트레스를 더 받기 쉽다. 모두가 즐거운 추석이 되도록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승환 기자 lsh@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