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카메라는 아버지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캐논이나 니콘, 아사히 펜탁스 같은 종류의 묵직한 수동카메라는 가죽가방에 잘 넣어져 장롱 깊숙이 숨겨져 있거나 방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 가끔 가족행사나 놀러갈 일이 있어야만 아버지는 연례행사처럼 카메라를 꺼내셨는데, 그럴 때면 우리를 적당한 위치에 세우고 어김없이 이렇게 소리치셨다. “자, 찍는다. 웃어라. 하나~아, 두~울, 셋!”
이 ‘하나, 둘, 셋’의 의미는 물론 ‘셋’하는 동시에 예쁘게 웃으라는 뜻이었겠지만, 사실은 필름값이 아까우니 눈을 감거나 이상한 짓을 하면 알아서 하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도 포함된 것이었다.
#‘기록 본능’ 살려낸 디지털 카메라
어린 시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빛바랜 앨범에는 대부분 아버지가 찍어 주신 이 ‘하나, 둘, 셋’ 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포즈는 아버지의 신호 앞에서 어색한 차렷 자세이기 일쑤고, 표정도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학창 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갈 때면 누군가가 가져 온 자동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서로 찍어 달라며 또 얼마나 쑥스럽고 느끼한 포즈를 취했던가. 사진 찍는 친구 역시 ‘하나, 둘, 셋’을 빼먹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카메라는 더 이상 아버지의 전유물이 아니다. 카메라 가게에는 아버지보다 아들과 딸들이 넘쳐난다. 카메라가 권위를 내려 놓은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다. 디지털이 필름을 대체하면서 ‘현상과 인화’라는 지루한 과정은 생략되고, 찍는 즉시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또 기술의 발전은 조작을 한결 편리하게 해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진가 박지석씨(41)는 “생각해 보십시오. 필름 카메라였다면 누가 새로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사진으로 찍어 남에게 보여 주겠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디지털 카메라의 힘입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만큼 찍을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지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카메라는 권위를 버렸고 이젠 필름조차 버릴 일이 없으니 잘못된 사진이 나올까봐 ‘하나, 둘, 셋’하고 시선을 모으는 것도 의미가 없다.
아이에게도 사진 찍자는 말 대신 같이 놀아 주며 환히 웃기를 기다려 보자. 고정된 자세보다는 노는 모습이, 사진을 찍기 위해 만든 표정보다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웃음이 더 감동을 주지 않을까.
사진가 난다씨(41)는 “이제 사진은 우리 일상과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누구나 ‘똑딱이’(소형 자동카메라) 하나쯤은 가지고 있고 카메라가 장착되지 않은 휴대전화가 오히려 귀한 시대가 되었지요. 잘 찍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을 버리고 일상에서 놀이하듯 즐기며 찍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디지털시대 사진의 미덕입니다.”고 말한다.
#잘찍은 사진 한장, 열 추억 대신한다
남윤중 아자스튜디오 실장(39)도 “멋지게 찍힌 사진보다 망가지더라도 즐거운 순간에 찍힌 사진이 가슴속에 더 오래 남는 법입니다. 사진 찍을 땐 많이 찍고, 누군가 나를 찍어 준다면 그 앞에서 허물없이 자연스럽게 놀아 보세요. 안 나오면 어때요. 어차피 사진이란 게 수십장 찍어 한두장 건지는 거 아닙니까?”라며 즐겁게 사진 찍기를 강조했다.
세월이 흘러도 행복하게 찍힌 사진 한장은 볼 때마다 나를 그 시절로 데리고 가는 마법을 부린다. 힘든 일상을 견디게 한다.
김도웅 기자 pachino8@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