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업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미래를 이끌 젊은 농업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장래 한국농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견인할 수 있는 농업인이 계속 수혈돼야 농업의 미래가 밝고, 농촌이 유지될 수 있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농업에 뛰어든 후계농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농촌에 희망을 불어넣고 있는 청년 리더를 만나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발휘하는 소나무처럼 아버지의 노력도 뒤늦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10년간 제가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은 ‘땅과 나무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하의 날씨에도 유용희(67·충남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유신(41) 부자가 운영하는 농장은 진한 황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다. 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황금소나무가 뿜어내는 자태다.
“아버지께서 17년 전 돌연변이 소나무를 발견해 개량한 품종들입니다. 현재 황금소나무만도 14개 품종이 있고, 호랑이 가죽처럼 알록달록한 무늬의 호피송과 닭볏을 닮은 계관송 등을 합해 80여종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들 유신씨의 설명이다. 그는 “병해충만 잘 관리하면 소나무는 여느 작목보다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며 “내년 봄에 사 가겠다고 주문이 들어 온 묘목만도 벌써 4만그루나 된다”고 했다.
아버지 유용희씨가 소나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다. 농고 원예과를 졸업하고 종묘사에서 연구농장장으로 근무하던 유씨는 1970년 국비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당시로선 첨단기술인 조직배양 기술을 터득하고 귀국했어요. 하지만 국내에서 이 기술을 활용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땐 서울대에도 조직배양 기계가 없었던 시절이죠.”
낙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유씨는 채소 육종과 조경으로 생활비를 벌면서 틈틈이 소나무 육종에 나섰다. “일본에서 조경수로 소나무가 큰 인기를 얻는 걸 보고 ‘한국에서도 조만간 소나무가 각광을 받는 시대가 오겠구나’ 생각했죠.” 그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희귀 소나무 종자를 수집했다.
“쌀이 떨어져 온 식구가 고구마로 겨울을 날 때도 희귀 소나무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갔어요. 소나무에 미쳤다는 소리도 여러번 들었지요. 소나무 묘목을 팔아 돈을 벌기 시작한 게 불과 4~5년 전이니, 그동안 가족들이 너무 고생했죠.”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유신씨는 어려서부터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에서 통신공학을 전공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기업에 취직했다. 4년간 회사생활을 하던 유씨는 1999년 돌연 사표를 냈다. “아버지가 고생해서 육종한 소나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국민소득이 3만달러에 이르면 일반 가정집에서도 조경수로 소나무를 사용할 것으로 판단했죠.”
이런 아들을 아버지는 처음부터 반기지 않았다. 처음 3년은 일반 인부들처럼 하루종일 나무를 심고 가꾸도록 했다. “아버지한테 맞아가며 일을 배웠어요. 게으름 필 겨를이 없었죠. 지금도 아침 6시40분이면 어김없이 농장에 갑니다.”
유신씨는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우는 동시에 농장 규모를 조금씩 늘려 갔다. 현재 충남 서천·보령과 전북 군산에 11.6㏊(약 3만5,000평)의 산림농장에서 묘목을 생산하고 있다. 또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판단, 고구려대학(구 나주대학)에서 조경학을 공부했다.
현재 황금소나무 1년생 한그루 가격이 1만5,000~3만원인데 반해 10년생은 50만원을 훌쩍 넘는다. 또 15년생 이상은 부르는 게 값이다. 그만큼 소나무 농사의 미래가 밝다는 게 유신씨의 설명이다. 그는 “가로수용·공원용·아파트조경용·분재용 등으로 세분화해 묘목을 생산하고 있다”며 “소나무가 농가의 새로운 소득작목으로 부상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천=김상영 기자 supply@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