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협정(FTA)이 국내 농업과 국민경제에 미친 영향을 계량화한 연구자료가 발간돼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최근 ‘농업부문 FTA 이행 영향 및 보완대책 평가’란 연구보고서를 통해 “FTA에 따른 농산물시장 개방은 해당 품목은 물론 대체작물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농업분야 생산 감소는 농업 자체보다는 국민경제에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2008년 현재 발효중인 한·칠레 FTA와 한·아세안 FTA, 한·EFTA(유럽연합 미가입 4개국 연합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대체품목 피해 더 커
2004년 8,317t에 불과하던 칠레산 포도 수입량은 2008년 2만9,473t으로 늘었다. 2004년 4월 한·칠레 FTA가 발효되면서 칠레산 포도에 붙는 관세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경연은 칠레산 포도 수입 급증으로 국내 포도 생산액이 연간 51억~73억원 감소한 것으로 추정했다.
문제는 피해가 포도 한품목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칠레산 포도는 소비에서 대체관계에 있는 딸기와 감귤에도 영향을 끼쳤다. 농경연에 따르면 칠레산 포도 소비가 늘면서 국내 딸기 생산액은 연간 31억~64억원, 감귤 생산액은 20억~40억원 감소했다. 칠레산 포도가 국내 포도농가보다는 딸기·감귤농가에게 더 큰 피해를 준 셈이다.
키위도 마찬가지다. 칠레산 키위 수입으로 국내 키위 생산액은 연간 2억7,000만~2억8,000만원 줄었지만, 키위와 경쟁관계에 있는 복숭아 생산액은 24억~57억원이나 감소했다. 국내 복숭아농가가 지구 반대편의 키위농가와 경쟁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함께 농경연은 포도주 수입이 늘면서 국내 소주 생산액이 98억~120억원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칠레산 적포도주 수입액은 2003년 235만6,000달러에서 2008년엔 2,694만3,000달러로 5년 새 11.4배 늘었다.
◆계절관세 효용성 기대 못 미쳐
현재 칠레산 포도에는 일정 시기에만 높은 관세를 매기는 계절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국내 성출하기(5~10월)에는 기존의 45.5%가 그대로 부과되고, 나머지 기간(11~4월)의 관세는 매년 4.1~4.2%씩 감축된다. 2008년의 경우 1~4월까지는 24.8%의 관세가 부과됐으나 국내산 포도가 본격 출하되는 5월부터는 관세가 45.5%로 올라가는 식이다.
그렇지만 최근 저장기술이 발달하면서 칠레산 포도는 성출하기에도 국내산과 직접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
2008년 4월 한달간 칠레산 포도 수입량은 1~3월 평균 수입량 6,514t의 4.3배인 2만8,053t을 기록했다. 수입업자들이 관세가 낮은 4월에 대량으로 수입했다가 5월 이후에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 한·미 FTA와 한·유럽연합(EU) FTA에서는 오렌지와 포도가 계절관세 품목으로 분류됐다.
◆직접피해 640억원 … 다른 산업도 악영향
FTA로 수입 농산물의 관세가 낮아지면 국내 해당 농가가 1차적으로 피해를 입고(직접효과), 이 농산물을 이용하는 다른 산업도 피해를 보게 된다(간접효과). 또 농가소득 감소는 소비 감소로 이어지면서 서비스 등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유발효과).
농경연은 FTA가 돼지고기·포도·딸기·감귤·키위·복숭아·소주 7개 품목에 미친 직접효과가 2008년 기준 마이너스 640억8,000만원, 간접효과는 마이너스 976억원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또 유발효과도 마이너스 461억5,000만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피해대책 현실 맞게 손질 필요
한·칠레 FTA가 발효된 2004년 이후 2007년까지 정부로부터 폐업지원금을 받고 작목을 전환했거나 농사를 포기한 농가는 △복숭아 1만4,903농가 △시설포도 1,560농가 △키위 397농가 등 모두 1만6,860농가에 이른다. 정부는 이들 농가에게 가구당 평균 1,410만원의 폐업지원금을 지급했으며, 전체 폐업 면적은 5만8,000㏊에 달했다.
그렇지만 농림수산식품부 조사 결과 폐업농가의 30.2%인 4,518농가가 대추·자두·사과·단감 등 과수 농사를 다시 선택한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농사를 포기한 농가는 9.5%인 1,416농가에 불과했다.
농경연은 과일 수요의 대체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폐업지원금을 받은 농가가 다시 과수로 전업할 경우 다른 과일에 피해를 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FTA가 확산되면서 현재 복숭아·시설포도·키위로 한정된 폐업 대상 작목이 증가할 경우 수입 피해가 적은 몇몇 품목으로 생산이 집중되면서 해당 품목의 가격 하락과 농가경영 악화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진단했다.
김상영 기자 supply@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