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확기 벼 매입가를 놓고 빚어지는 농가와 산지유통업체간 마찰을 줄이기 위해 ‘수탁판매 활성화’ 대책을 내놓았다(본지 10월12일자 1면 참조). 해마다 되풀이되는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합리적인 쌀값 형성을 도모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현실적 여건은 녹록지 않다. 수탁판매의 현황과 과제를 짚어 본다.
#적정 계절진폭 발생해야
“단경기에 적정 계절진폭이 꾸준하게 형성돼야 수탁판매가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계절진폭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손해를 본 농가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지난해 수탁판매를 처음 도입한 충남 아산 둔포농협(조합장 김찬석)의 유홍식 미곡종합처리장(RPC) 장장은 수탁판매의 전제조건으로 계절진폭을 꼽았다. 역계절진폭이 자주 발생하는 구조 아래서는 농가와 유통업체간 혼란만 키울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둔포농협은 지난해 수확기 벼 매입가를 놓고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2008~2009년 연이은 대풍으로 쌀값이 13만원대(80㎏ 기준)로 추락한 상황에서 농가들은 생산비를 보장해달라며 평년 수준의 가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둔포농협은 ‘수탁판매’란 모험을 시도했다. 일반 농가엔 40㎏ 벼 한포대당 4만8,500원의 확정가를 지급했지만, 수탁에 응한 농가엔 시세의 80% 수준인 3만7,000원의 선급금을 지급한 뒤 이듬해 1월 나머지 차액을 정산해 주기로 한 것. 전체 매입량 8,000t의 20%인 1,600t에 대해 수탁 신청이 들어왔다.
다행히 쌀값은 수확기 이후 강세를 이어갔다. 농협은 올 1월 수탁에 참여한 농가들에게 벼 40㎏당 1만2,500원을 추가로 지급했다. 수탁농가가 매취에 비해 포대당 1,000원을 더 받은 셈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회원 전원이 수탁을 신청했다는 이종수 명미작목반 회장(52·둔포면 신남리)은 “작목반원들이 쌀 판촉전에 직접 참여하는 등 주인의식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며 “최종 정산시기를 좀더 늦췄다면 포대당 2,000~4,000원은 더 받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올해 계절진폭이 크게 발생하면서 수탁에 대한 농가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현재 수탁을 신청한 물량은 지난해의 두배인 3,000t에 달한다. 둔포농협은 올해 수탁 대상 농가를 농산물우수관리제(GAP) 인증농가로 한정하고, 브랜드도 <아산맑은쌀 청>으로 단일화하기로 했다. 품종과 브랜드, 쌀 판매시기에 따라 최종 정산가격이 달라지다 보니 체계적인 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정산시기는 수탁의 기본취지를 살리도록 5월 이후로 늦추기로 했다.
#‘신뢰’가 열쇠
지난해 전국 산지유통업체가 사들인 벼 215만t 가운데 수탁방식은 26만t(12%). 농림수산식품부는 26만t을 올 3월에 쌀로 판매했다면 농가들은 267억원의 추가이익을 얻었을 것으로 추산했다. 올 3월 쌀값(80㎏ 기준 14만8,848원)이 지난해 수확기(13만7,416원)에 견줘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농가는 물론 유통업체도 수탁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농가 수취가격이 오른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농민단체들은 벼 수탁판매가 전면 도입되면 농협이나 RPC가 수수료에 의존하면서 판매에 소극적으로 나설 것을 우려한다. 농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수탁판매는 가격 등락의 위험을 모두 농가가 떠안는 방식”이라며 “농가와 농협간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갈등을 키우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계 관계자는 “수탁판매는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는 쌀 수급구조에서 손익을 생산농가와 RPC가 분담한다는 합의가 전제돼야 하는데 아직 우리 농가들은 이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하다”며 “산지유통업체가 더욱 높은 값에 벼를 팔아 준다는 ‘확신’과 유통업체를 믿고 출하한다는 ‘믿음’을 형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