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살림살이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물가 잡는다고 농민들을 이렇게 몰아세우니, 정말이지 정부에서 농사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정부에서 발표한 김장채소 수급안정대책을 두고 산지농가들은 ‘역시나’ 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수입농산물을 통해 국내 농산물값 하락을 유도하려는 기존의 수급안정대책이 되풀이됐다며 정부 정책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모양새다.
◆농가 희생 부추기는 정부 대책=충북 음성에서 고추 농사를 짓고 있는 이원희씨(48)는 “지난여름 긴 장마로 탄저병이 확산되면서 고추농가 열에 여덟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면서 “생산량이 적어서 고추값이 올라간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정부에서 앞장서 수입농산물을 들여오고, 비축물량까지 방출한다고 하니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정부 정책에 분통을 터뜨렸다.
고추농가들은 고추값을 낮추는 일보다 생산기반을 잃고 신음하는 농가부터 먼저 챙기라며 정부의 농업에 대한 잘못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북 의성에서 1만2,540㎡(3,800평) 규모로 마늘 농사를 짓고 있는 오상학씨(57)도 “지난번 정부에서 중국산 햇마늘을 들여온다고 난리치는 통에 산지 마늘시장이 얼어붙고 국내산 마늘값이 크게 하락해 농가들이 큰 손해를 봤다”면서 “정부 비축물량을 풀어 마늘값을 잡겠다고 하는 것은 마늘 소비 성수기인 김장철에 돈 좀 벌어 농가부채를 그나마 줄여 보려는 농가들의 바람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라고 하소연했다.
◆국산 고추·마늘값에 직격탄=중국산 고추와 마늘이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국내산 고추와 마늘값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어 정부 계획대로 김장철 정부 비축물량이 집중적으로 시중에 풀릴 경우 국내산 고추와 마늘값 하락속도는 더욱 가파르게 전개될 것으로 농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실제 국산 건고추값은 추석을 앞두고 산지에서 600g 상품(화건)이 지난해보다 3배가량 높은 평균 2만원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정부에서 할당관세물량의 관세율을 낮춰 가며 싼값으로 중국산 고추를 수입하자 국산 건고추값은 5,000원 이상 떨어졌다.
마늘도 마찬가지다. 국내산 마늘값(한지형)은 공급량 부족으로 상반기 출하 당시 1㎏당 4,000원을 웃돌면서 고공행진을 이어갔지만 하반기 들어 정부 비축물량을 포함해 중국산 햇마늘 수입이 본격화되면서 마늘값은 1,000원 이상 하락했다. 이처럼 국내산 고추와 마늘값은 중국산 저가 농산물 탓에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추세로 고추 및 마늘농가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산 농산물=더욱 우려되는 것은 정부의 물가안정대책에 따라 중국산 고추와 마늘 수입물량은 걷잡을 수 없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8~9월 중국산 고추 수입량(건고추 환산)은 1만5,000여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36%나 늘어났다. 중국산 마늘도 27%나 증가한 1만2,000여t이 들어왔다. 10월에도 중국산 고추와 마늘은 대량 수입될 것으로 유통 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김장철에 관세할당물량으로 들여온 수입품 가운데 건고추는 매주 700t, 마늘은 1,000t가량씩 방출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관련, 경북 봉화의 농가 장성규씨(74)는 “농산물값이 조금만 오르면 정부에서 수입농산물로 물가 안정을 꾀한다고 떠들어대는데 ‘물가 안정’이 결국 농민 등친다는 의미와 뭐가 다르냐”며 정부 정책을 질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