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이는 꾀복쟁이(벌거숭이) 친구다. 키가 훤칠하고 입이 크고 눈이 째졌으며 코는 길게 늘어졌다. 볼과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있어 빠진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으면 어린아이들이 지레 겁먹고 울음보를 터트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팔성사(전북 장수에 있는 사찰) 입구의 사천왕처럼 생겼다고 봐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관상이다.
사방이 거악들로 둘러싸인 장수에서 태어난 준이는 어렸을 때 큰 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발이 버스 뒷바퀴에 치어 뒤틀렸다.
그래도 겅중거리며 운동회에 참석했으며 학교도 빠지지 않고 잘 졸업했다. 때마침 이농현상과 산업화 바람이 불어 준이는 의무교육만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 뒤는 그야말로 풍찬노숙.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은 안해 봤지만,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배달·껌팔이·막노동·구두닦이·식당보이·피 팔기까지, 세상 가장 밑바닥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준이에게 대도시는 냉혹했다.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지만 성하지 못한 몸으로 견디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영양결핍과 알코올중독을 등에 지고 고향 땅으로 내려왔다. 가난했지만 부모 형제 친구가 있는 고향은 그런대로 살맛이 났다. 이런저런 봇짐장수를 거쳐 나이 50대 중반에 자활센터에서 고물팀장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 남이 버린 고물이 준이에게는 보물이 된 셈이다.
그리고 밥보다 더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보다 더 기록적인 사건이었다. 해답은 바로 장가에 있었다. 40대 중반에 20대 초반의 베트남 신부를 맞이하는 날, 준이의 큰 입은 귀를 지나 뒤꼭지에 닿아 있었다.
우리 동창들은 축하해 주면서도 내심 부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미 결혼생활 20년이 넘어 부부 사이가 빚보증 선 처사촌보다도 덤덤하게 보일 나이였으니, 침을 꼴깍 넘기는 친구도 있었다. 역시 인생은 살 만한 것이었다.
한데 늦복이 터져도 로또 대박이 터졌다. 술도 끊고 착실하게 돈 모으며 살아가는 줄 알았던 준이가 한 3~4년 연락을 안하더니, 어느날 느닷없이 청첩장을 보냈다. 그 사이 경제 문제와 문화 차이로 다투다가 첫번째 부인과 헤어지고 두번째 부인을 맞이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런 제길! 남들은 한번도 제대로 못하는 결혼을 두번씩이나 하다니! 그것도 25살 꽃다운 신부와…. 친구들 중에는 자녀를 결혼시켜 할배 할매가 된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지자체가 지원한다 해도 이건 무슨 비밀스러운 무기가 있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각방을 쓰는 친구들은 그저 담배를 빼물고 헛기침만 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이는 1t 트럭을 몰고 장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다닌다. 청정구역 장수를 위해 무한봉사를 하고 있다.
요즘도 군청 앞이나 김밥집 근처에서 준이를 자주 만난다. 비가 온 뒤에 날씨가 쌀쌀해져 물었다.
“준아, 타작은 했냐?”
“얌마, 타작 한 지가 언젠디. 방아까지 찧어다 놨다.”
부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준이는 방아 찧는 쪽으로는 선수인가 보다. 뒤에 한마디 덧붙이는 말이 걸작이다.
“얌마, 방아야 물레방아·보리방아·밀방아·쌀방아·깨소금방아 별것 다 있어도 내 육봉방아가 제일이여.”
준이는 밤마다 육봉방아를 기가 막히게 잘 찧어서 예쁜 공주님 둘을 낳았고 하나 더 낳을까 고민중이란다. 준이는 누구보다 애국자다.
●유용주<시인·소설가>=1959년 전북 장수 생. 14살 때부터 학교를 못 다니고 목수·배달원·웨이터·막노동꾼 등을 경험했다. 1991년 <창작과비평> 가을호로 작품 활동시작. 문단 권력에 얽매임 없이 자유분방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