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만t+a. 정부가 쌀값 안정을 위해 준비한 실탄이다. 60만t은 우리 국민의 2개월치 소비량이며, 지난해 경기도와 강원도 쌀 생산량을 합친 물량(57만6,000t)보다도 많다. 이는 ‘수급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그동안의 설명을 뒤집은 조치여서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게다가 정부는 가공용 수입쌀 중 일부를 밥쌀용으로 전환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1995년 쌀시장이 개방된 이래 가공용 수입쌀이 밥쌀로 공급된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양곡업계 관계자는 “쌀 수급정책이 붕괴된 것은 물론 10여년간 노력해 온 고품질 쌀 정책도 후퇴하게 됐다”고 했다.
◆방출 계획은
우선 정부는 2009년산 비축쌀 33만t 가운데 20만t을 40㎏ 벼 한포대당 2만3,500원씩 시장에 풀기로 했다. 이 쌀은 11일 공매를 거쳐 이달 하순쯤 시장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밥쌀용 수입쌀 21만t도 앞당겨 도입키로 했다. 당초 올해 4월 수입될 예정이던 2011년분 10만t은 지난해 12월 한국땅을 밟았고, 2012년분 11만t도 내년 4월에서 올해 4월로 1년 일찍 수입된다. 2년치 물량을 한꺼번에 풀겠다는 것이다. 2005년부터 수입될 예정이던 밥쌀은 준비기간 등을 이유로 이듬해로 미뤄졌고, 이런 현상은 2010년까지 이어졌다.
2011년 공공비축 매입 마감시한(12월31일)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2011년 12월31일 마감된 공공비축용 쌀 매입량은 목표량 34만t보다 8만t 부족한 26만t에 그쳤다. 공공비축 매입을 중단하면 시중 유통물량을 8만t 늘리는 효과가 있다.
정부는 이런 조치에도 쌀값 불안이 계속되면 2009년산 비축쌀 잔량 13만t도 시장에 풀고, 수입쌀 판매가격도 낮추기로 했다. 지난해 11월 기준 중국쌀 공매가격은 20㎏ 한포대에 1만3,000원에 불과하다. 이는 수입가격에 관세(5%), 운송비와 보관료 등을 합친 도입원가 2만5,000~3만원의 절반 수준이다. 수입쌀 저가 판매로 발생하는 손실이 수백억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공매가격이 더 내려가면 막대한 재정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수입쌀을 국내산과 섞은 혼합미가 대량 유통되면 쌀시장 전면 개방을 대비해 그동안 꾸준히 추진해 온 고품질 쌀 정책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으로 우려된다. 서울 양곡도매시장 관계자는 “혼합미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수입쌀을 써본 식당은 어지간해서 국산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1년산 햅쌀 방출도 준비중이다. 정부는 지난해 수확기 공공비축용으로 사들인 26만t 가운데 군·관수용 수요 20만t을 제외한 6만t을 정가할인 판매를 통해 조기에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소비자 쌀값을 10% 내린 조건을 걸고 정부가 가진 벼를 매입가 대비 10% 싸게 공매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런 계획이 모두 시행되면 시장에 추가로 공급되는 쌀은 2009년산 33만t, 2011년산 6만t, 수입쌀 21만t 등 60만t에 달한다. 게다가 정부는 쌀값이 크게 상승하면 가공용으로 들여온 중단립종 수입쌀 43만t 중 일부를 밥쌀용으로 전환해 시장에 풀겠다는 계획이다.
◆정부창고 텅 비나
정부가 새해 벽두부터 비축쌀을 대거 방출키로 한 것을 두고 ‘지난해 생산량이 수요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방출 규모가 단순히 가격안정을 꾀하기 위한 양으로 보기엔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선 양곡업계는 생산량 통계에 또다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통계청은 2011년 쌀 생산량이 2010년에 견줘 1.7% 줄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011년 수확기 정부·농협·민간미곡종합처리장(RPC)의 매입량은 2000년대 들어 최악의 흉년이던 2010년보다 11% 넘게 감소했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가격상승을 기대하며 출하를 미루던 대농들도 정부 공매설이 흘러나오던 지난해 연말 물량을 대거 쏟아냈다”며 “또 공공비축 거부 투쟁을 벌이던 전남지역은 매입 마감기한 막판에 대거 수매에 응했고, 이 때문에 전남지역 매입률은 전국 평균을 웃돌았다”고 설명했다. 예상과 달리 농가 보유물량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수급부족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통계청은 지난해부터 쌀 생산통계를 산출할 때 현미를 쌀로 환산하는 현백률을 종전 92.9%(9분도)에서 90.4%(12분도)로 바꿨다. RPC에서 쌀 품질을 높이려고 벼를 더 깎아내는 추세를 반영한 것. 새 규정을 적용하면 쌀 생산량은 422만4,000t에서 411만t으로 줄어든다. 이는 농식품부가 추정한 올해 수요량 418만t을 밑도는 수치다. 산지 RPC 관계자는 “대개 도정수율(벼를 찧어 쌀이 되는 무게비율) 하면 72%로 생각하지만, 싸라기·청치(덜 익어 푸른 쌀)·사미(성장 과정에서 죽은 불투명한 쌀)를 제거한 완전미를 생산하려면 65~67%로 내려간다”며 “2011년산 도정수율이 흉년이던 2010년산보다는 좋지만 평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공용 수입쌀을 밥쌀용으로 전환하겠다는 발표가 성급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우리나라는 쌀시장 개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수입쌀을 전량 가공용으로만 사용하겠다’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후 2004년 쌀협상에서는 관세화 유예 대가로 수입쌀 일부를 백미 상태로 들여와 밥쌀로 사용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다만 나머지 수입쌀은 전량 가공용으로 사용키로 했다. 양곡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이번 계획은 우리 스스로 가공용을 밥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지를 쌀 수출국에 보여 준 것”이라며 “각종 대외협상에서 후유증이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출처 : 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