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가 우리 문화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70년대. 흔히 1970년대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코드로 맥주, 청바지, 장발, 통기타를 꼽는다. 장발에 통기타를 들고,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던 젊은이들의 모습은 개발독재의 험악한 시대적 분위기를 달래는 저항의 상징이자 반문화적 표현으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당시 맥주는 비싼 술이었다. 4홉들이 맥주병에 담긴 막걸리가 100원인 데 비해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생맥주가 한잔에 500원이었으니 대학생들이 맥주를 마시기란 언감생심이었다. 더욱이 맥주는 골프와 같이 사치로 간주해 병뚜껑에도 세금을 매긴 터라 생맥주보다 병맥주가 훨씬 더 비쌌다. 통기타와 청바지가 대학생들의 상징인 것은 분명하지만 생맥주는 과외비 타는 날에 벼르고 별러야 한두잔 마셨을 만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오히려 1980년대 들어서야 대학가에 호프집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보편화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맥주 역사는 어떻게 될까. 1910년대에 일본인들이 맥주를 수입해온 뒤 서울 영등포에 조선맥주주식회사를 1933년에 세웠고, 곧이어 동양맥주가 들어섰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맥주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조실록’ 85권에 맥주(麥酒)가 기록돼 있다. 1755년(영조 31년)에 제사에 쓸 것 외에는 술을 담그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졌지만, ‘군인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할 때는 탁주만 쓰고, 농민들의 보리술과 탁주 역시 금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또 18~19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문서에 ‘모미주(牟米酒)’, 즉 보리술 양조법이 전해온다. 당시에는 맥주보리를 싹 틔운 뒤 구워 맥아를 만드는 기술도 없는 데다 맥주 특유의 쌉쌀한 맛을 내는 홉이 1930년대에 처음 재배됐으니 선조들이 마시던 맥주의 맛은 오늘날과 사뭇 다를 게 분명하다.
동양맥주와 조선맥주가 양분하던 맥주시장을 비집고 이젠백 맥주가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이젠백 맥주는 부드러운 독일식 맥주라기보다는 쓴맛이 강한 영국식 맥주인 탓에 오래 가지 못하고 몇 년 뒤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동양맥주와 조선맥주는 오늘날에도 카스와 하이트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맥주의 맛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맥아의 비율 문제다. 우리나라는 1999년까지는 맥아(보리 싹)가 67.7%를 넘으면 맥주 주세를 부과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67.7% 이하의 발포주들을 맥주로 표기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함에 따라 국내 맥주회사들이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해 맥아를 10%이상만 쓰면 맥주라고 허용해버렸다.
제조업체들은 주로 당분 같은 식품첨가물을 넣고 맥주의 맛을 내기 위해 강한 탄산을 주입했다. 탄산이 강하면 입 안 자극과 강한 목넘김 때문에 맛과 향을 느낄 겨를 자체가 없어진다. 맥주회사들이 청량감과 탄산감을 강조하는 꼼수를 부려 ‘톡 쏘는 맛’을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가 숨어 있다.
요즘 맥주와 소주를 곁들인 폭탄주가 술자리마다 성행하는 것도 맥주가 심심해진 탓이 크다. 맥주의 본고장 독일은 여전히 맥아·물·효모·홉만을 사용해 발효한 것을 맥주라고 고집한다. 세월이 흐르면 입맛도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갈증을 해소하는 시원한 맥주의 참맛이 어찌 쉬 변할 수 있으랴.
출처: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