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마저 도와주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소. 좋은 배는 모조리 떨어지고 작은 배만 듬성듬성 달려 있는데 억장이 무너질 것 같소.”
28일 배 최대 주산지인 전남 나주시 봉황면 죽성리 일대. 전날 밤부터 초속 30m가 넘는 강풍이 불면서 이 지역 과수원 바닥은 떨어져 나뒹구는 배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방풍망까지 서둘러 쳤지만 강풍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추석을 앞두고 목돈을 만져볼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정종균씨(67)는 “강풍이 끝난 게 아니고 또 태풍이 온다고 하니 겁부터 난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형이 강풍을 막아준 일부 저지대를 제외하고는 이 지역 대부분 과수원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이상계 나주배원예농협 조합장은 “나주지역 배 낙과율이 60~70%에 달해 피해액이 산술적으로 9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며 “정부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떨어진 배는 가공용으로 수매하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배면적이 상대적으로 적은 영암·순천지역도 피해가 극심했다. 배농사 2만6,446㎡(8,000평)를 짓고 있는 김용수씨(54·영암군 신북면 행정리)는 “방풍망을 두겹이나 쳤는데도 80% 이상 낙과돼 상심이 크다”며 “잎까지 많이 떨어져 후유증이 오래갈 것”이라고 허탈해했다.
김영래씨(75·순천시 낙안면 신기리)는 “나무 한그루에 고작 대여섯개의 배만 남았다”며 “그나마 붙어 있는 것도 상처를 입어 상품성이 있을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초강력 태풍 ‘볼라벤’이 서해안 지역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비닐하우스 단지가 밀집된 전북 고창군 무장면과 공음면 일대도 큰 피해를 입었다.
뿌리째 뽑혀 나간 가로수와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가로등이 도로 곳곳을 가로막고, 하우스마다 갈기갈기 찢겨진 비닐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비닐하우스 안은 고추와 멜론, 토마토 등 수확을 앞둔 농작물이 여기저기 나뒹구는 등 아수라장이 됐다.
7,590㎡(2,300평)의 하우스 14동이 모두 파손되는 피해를 입은 김이중씨(58·고창군 무장면 강남리)는 “오전부터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불면서 순식간에 하우스를 덮고 있던 비닐이 찢어져 허공으로 날아갔다”며 “수확을 불과 한달 정도 앞두고 있었는데 태풍으로 멜론을 한개도 출하할 수 없게 됐다”고 울먹였다.
선운산농협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 정구성 소장은 “지역 내 온전한 비닐하우스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해가 심각하다”며 “추석 대목을 앞두고 각종 농산물 출하로 북적여야 할 APC도 개점휴업 상태”라고 말했다.
경남 서부지역도 과수 농가를 중심으로 피해가 속출했다. 사과 주산지인 거창ㆍ함양ㆍ밀양의 경우 각각 529㏊, 17.6㏊, 300㏊의 과원이 피해를 입었으며, 낙과율은 거창ㆍ함양이 50%, 밀양이 10∼15%에 달했다. 사과는 낙과뿐 아니라 나무가 뿌리째 뽑힌 것도 많아 농업인들의 시름이 더 깊어지고 있다.
2,300㎡(700평)의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박복달씨(77ㆍ함양군 지곡면)는 “낙과 피해는 물론 전체 사과나무의 3분의 1이 뿌리째 뽑혔다”며 허탈해했다.
배 피해는 진주 350㏊, 하동 221㏊, 사천 65㏊ 등 서남부 지역에 집중됐으며, 심한 곳은 낙과율이 80%에 달했다. 진주시 문산읍에서 2만3,000㎡(약 7,000평)의 배 과원을 운영하는 정현숙씨(52)는 “보름만 더 있으면 즙으로라도 이용이 가능한데 이 시기에 떨어진 것은 전혀 쓸모가 없어 파묻을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경북 문경시 요성리와 고요리 일대 사과밭은 폐허로 변했다. 8~10년생 사과나무는 뿌리째 뽑히거나 부러져 있었다. 발갛게 익은 <홍로>가 땅에 떨어져 멀리서 봐도 사과나무 아래가 붉게 보일 정도였다. 과원 주위에 방풍림 역할을 하던 수십년된 감나무와 호두나무도 밑동이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혔다.
3,300㎡(1,000평) 규모의 사과농사를 짓는 장익현씨(51·문경읍 요성리)의 과원은 절반에 가까운 나무가 뿌리가 뽑히고, 부러져 땅에 드러누웠다. 장씨는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황준식 문경농협 조합장은 “요성리와 고요리 사과밭은 지난 7월 태풍 ‘카눈’ 때도 심한 낙과피해를 입었는데 이번에 또 태풍이 할퀴고 지나갔다”면서 “떨어진 사과는 가공용으로 최대한 수매하고, 농작물재해보험 등을 통해 농가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볼라벤’이휩쓸고 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 역시 집중포화를 맞은 듯 처참했다. 농로 주변에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잎들이 널려 있고 대부분의 하우스는 비닐이 찢어져 앙상한 뼈대만 드러낸 모습이었다.
특히 하우스가 파손되는 피해를 입은 농가들은 거의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열대작물인 아보카도와 아떼모야를 재배하는 최경석씨(49·대정읍 안성리)의 1,650㎡(500평) 하우스는 폭격을 맞은 듯 주저앉았다.
최씨는 “강한 바람에 손쓸 틈도 없이 하우스가 순식간에 무너졌다”며 “그동안 숱한 태풍에도 끄떡없었는데 살다 살다 이렇게 무서운 태풍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최씨는 “비싼 열대작목 묘목을 사다가 5년 동안 고생하며 키웠는데 거의 부러져 건질 게 하나도 없다”며 “농사를 포기해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하우스(1,650㎡)에서 고추를 재배하는 이찬수씨(59·대정읍 상모리)도 보름 후에 계획했던 풋고추 수확을 포기했다. 이씨는 “시세가 좋아 기대가 컸는데 피해를 당하고 나니 막막할 따름”이라며 “정부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 보상이라도 해 주지 않으면 다시 농사짓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한창 자라고 있는 콩도 피해가 컸다. 강풍으로 콩잎이 떨어져 광합성 작용에 큰 차질이 생김에 따라 꼬투리가 제대로 여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부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대정뿐만 아니라 안덕과 한경 등 서부지역 콩 수확량이 20~30%가량 줄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출처: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