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쌀 관세화 유예기간 종료 시점이 1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부가 대응을 본격화하고 있으나 아직 국민적 ‘확신’은 부족해 실리를 잘 따져 결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추가유예 가능한가=우리나라는 1995~2004년, 2005~2014년 두차례 쌀 관세화(전면개방)를 미뤄왔고 이제 그 기간이 끝나간다. 그렇다면 2015년 이후 우리나라의 쌀 관세화 유예조치는 어떻게 되는가. 다수의 전문가는 세계무역기구(WTO) 규정과 국제법상 관세화 유예 추가연장은 어렵다고 보고 있다. WTO 농업협정에는 쌀 관세화 유예 1차 연장을 위한 근거규정은 있지만 2015년 이후에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4년 이후 (쌀 관세화를) 재유예할 수 있는 방안이 현행 WTO 농업협정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WTO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와 더불어 유일하게 쌀 관세화를 유예한 필리핀은 최근 3차 유예를 시도했으나 ‘추가유예의 법적 근거가 미약하다’는 관련국들의 반발에 막혀 궁지에 몰려 있다. 우리나라의 관세화 추가유예 가능성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는 사례다.
◆관세화 손익 따져보면=법리해석이나 상황논리를 떠나 최대 관심사는 역시 관세화의 영향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관세화로 전환하면 이후로도 쌀 의무수입량이 2014년 수준인 40만9000t에 고정돼 추가 증량 부담이 없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관세화 유예를 재연장하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우선 쌀 수출국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려면 의무수입량을 대폭 늘려줘야 할 것으로 예측된다. 2004년 쌀협상에서 우리나라는 쌀 관세화를 10년간 유예하는 대신 의무수입량을 1988~1990년 국내소비량 기준으로 2004년 4%(20만5000t)에서 2014년 8%(40만9000t)까지 늘리기로 했다. 같은 조건으로 우리나라가 2015년 이후 10년간 관세화 추가 유예를 추진한다면 단순 계산으로 쌀 의무수입량은 국내소비량의 16%(80만t)까지 늘어난다. 국내소비 감소추세를 감안하면 의무수입량은 국내소비량의 20%에 육박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최근 필리핀은 쌀 관세화 3차 유예가 무산되자 대안으로 WTO 농업협정 의무면제(웨이버)를 얻기 위해 의무수입량을 35만t에서 80만5000t으로 2.3배 늘리고, 관세율은 40%에서 35%로 낮추며 국별쿼터도 늘리겠다는 양보안을 내놨지만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미국·호주·캐나다 등이 쌀 외에 자국의 관심 농산물에 대한 추가부담을 필리핀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필리핀이 의무면제를 받는다 해도 매년 면제조건과 기한을 재검토받아야 하는 등 필리핀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상유지 가능성은=국내 일각에는 여전히 우리나라가 쌀 관세화 유예를 계속하면서도 2015년 이후 쌀 의무수입량을 2014년 수준(40만9000t)으로 묶어둘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우루과이라운드(UR) 농업협정의 후속협상인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쌀을 관세화로 전환하지 않고 추가협상도 벌이지 않을 수 있다는 현상유지전략, 이른바 ‘스탠드스틸(standstill)’이 그것이다. 장경호 녀름 부소장은 “DDA 협상이 장기 표류하면서 WTO 회원국들은 선진국과 개도국 지위에 따라 각각 2000년과 2004년 이후에는 추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계속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며 “따라서 우리도 관세화 유예를 계속하면서 의무수입량도 늘리지 않고 고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논리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견해다. UR 협상과 DDA 협상은 별개이며 쌀 관세화는 UR 협정에서 발생한 의무로, 우리나라는 한시적 예외조치를 인정받은 것이란 얘기다. 따라서 그 기간이 종료되면 별도 합의가 없는 경우 원칙에 따라 관세화 의무가 발생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현상유지가 가능했다면 필리핀이 엄청난 대가가 따르는 의무면제협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최경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는 “쌀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는 방법은 (WTO상의 의무 면제인) 웨이버뿐”이라며 “필리핀도 다각적으로 여러 방법을 검토했지만, WTO 체제 아래에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결론 내리고 웨이버 협상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현상유지를 주장하면 관련국과의 분쟁이 필연적이며 WTO분쟁에서 패소할 가능성이 크고, 이 경우 막대한 손해배상과 최악의 조건에서의 관세화 개방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추가 검토할 과제는=관세화에도 예측할 수 없는 위험요소는 있다. 정부는 쌀을 관세화로 전환해도 의무수입량외에 고율관세를 물고 수입되는 양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와 달리 최근 국제 쌀값이 크게 올라 국내외 쌀값 격차가 줄어 실익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1999년 쌀을 관세화한 일본은 의무수입물량 외에 고율관세 수입쌀이 연간 400t에 불과하고, 2003년 관세화한 대만도 고율관세 수입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국제 쌀값 강세가 지속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에 관세화로 전환할 때 적용할 관세상당치(TE) 산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자협정인 WTO 규정에 따른 쌀 관세화와 양자협정인 자유무역협정(FTA)과의 연계성도 보다 면밀하게 따져봐야 할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관세화하면 쌀도 FTA 협상에서 관세철폐 협상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한·중 FTA 협상에서 쌀은 초민감품목군에 최우선 포함시켜 제외할 계획이며 한·미 FTA의 경우 협정문에 ‘쌀은 관세 관련 어떤 의무도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재협상 여지는 없다”고 설명했다.
출처: 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