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강은 처음부터 우리 땅에서 자란 식물은 아니다. 1300여 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신만석이라는 사람이 중국 봉성현에서 들여온 전래 식품이자 약재다. 처음 가져왔을 때 중국의 생강 재배지였던 봉성현의 ‘봉’자를 따라 전남 나주 봉황과 황해도 봉산에서 시험재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전북 완주 봉동에 심어 성공했다. 이후 봉동은 생강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유명한 이강주도 봉동 생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 생강은 왕들의 감기를 치료하는 ‘신의 한 수’로 여겨졌다. 선조임금은 기침과 가래 증상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과반환이라는 한약과 함께 생강과 귤피를 달여 만든 강귤차를 마셨다. 찬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거나 설사를 했던 약골 체질의 영조임금은 자신의 허약한 위장을 보강하기 위해 강귤차를 마셨다. 그래서일까. 조선왕들의 평균 수명은 47세에 불과했지만, 영조는 83세까지 천수를 누린 장수대왕이 됐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으며 광해군의 오른팔이었던 정인홍은 기침과 가래가 심해지자 특별히 왕에게 부탁해 내의원에서 관리하던 생강을 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유학적으로 생강은 음식이나 약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조선시대 왕들의 이상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이 되는 것이었는데, 안으로는 성현 같은 인격을 완성하고 밖으로는 왕다운 왕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현은 공자다. <논어> 향당편에는 ‘공자가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이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생강은 정신을 통하게 하고 내부의 탁한 악기(惡氣)를 없앤다는 주석까지 달려있다. 생강이 소화를 도와 속을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인조임금은 유학적 의미를 되새기며 생강을 자주 먹고 자신의 스승에게 특별히 선물하기도 했다.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소화와 달리 한의학에서 말하는 소화는 ‘부숙수곡(腐熟水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부(腐)는 삭힌다는 의미고 숙(熟)은 찐다는 뜻이다. 수곡(음식물)을 삭히고 찌는 것이 한의학에서 말하는 소화인 것이다.
생강은 따뜻한 온기와 매운맛을 가진 대표적인 온성식품이다. 생강의 효능과 관련해 <본초강목>엔 ‘들짐승을 잡아먹고 중독됐을 때 해독작용이 강하다’고 기록돼 있다. 사실 여름에 날생선을 먹으면 세균성 이질이 잘 생기는데, 이때 생강은 장에서 세균을 잡아 주는 파수병 역할을 한다. 또 한약을 달일 때는 반드시 동전 크기만 한 생강 세 쪽과 대추 두 개를 넣는다는 ‘강삼조이(薑三棗二)’의 법칙이 한방의 중요한 조제법칙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이는 생강의 효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식품이나 약재도 체질에 맞아야 한다. 더위를 잘 참지 못하는 사람, 폐결핵 환자, 오후에 목과 어깨로 열이 올라오는 사람은 생강이 해로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동의보감>엔 ‘생강을 너무 오래 먹으면 열이 쌓여 눈병을 앓는다’고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