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생명체가 엄습하고 있다. 한번 당하면 피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정확히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침입했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냄새도 없고 색도 없다. 눈으로는 더더욱 볼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생명체가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점이다. 어렴풋이 그 존재를 파악할 즈음이면 변종이 생겨나 삽시간에 다른 생명체에 파고든 뒤 면역체계를 뒤흔들어 고사시킨다. 세계는 끊임없이 이 괴이한 생명체와 소리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존재는 곰팡이도 세균도 아닌 ‘바이러스’다.
◆갈수록 문제되는 식물바이러스=바이러스는 생물활성을 갖는 병원체로 규정되는 물질이다. 동물과 식물체 모두에 해를 끼친다.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는 가축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형태에 따라 인체 전염성까지 띠어 일반인들도 위험성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식물체 바이러스는 그동안 관심 밖에 있었다. 인체에 해가 없다는 점 때문에 동물체 바이러스에 견줘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병원체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실체를 들여다보면 동물체 바이러스 이상으로 위해가 심각한 게 식물체 바이러스다.
특히 식물체 바이러스병은 곡물·채소·과일 등 모든 농작물에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치료 농약이 없어 한번 발병하면 피해를 회복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농가가 입는 손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농촌진흥청 분석에 따르면 국내에서 바이러스병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액은 연간 8000억원으로 추정된다. 1998년 문제가 된 오이녹반모자이크바이러스병처럼 돌발적인 바이러스병이 발생하면 직접적인 피해규모는 1조원을 훌쩍 넘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가적 재앙으로 불린 2010~2011년 구제역으로 인한 농가의 직접적인 피해액(3조원)보다 적지만 과거 최악의 AI로 기록된 2008년 피해액(3070억원)의 세배나 되는 규모다. 게다가 농작물 바이러스병은 매년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더한다.
◆국내 농작물 바이러스병 실태=전 세계적으로 확인된 식물체 바이러스는 1000여종에 달한다. 우리나라에는 현재까지 156종의 발생이 보고돼 있으며 지구온난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와 시장개방 확대의 영향으로 외래 돌발 바이러스병이 계속 늘고 있다.
국내 156종의 식물체 바이러스 가운데 75%(117종)는 1988년 이후 처음 보고된 신종 바이러스다. 국내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바이러스 진단기술이 고도화돼 이전에는 규명이 어려웠던 신종 바이러스를 더 빨리 찾아낼 수 있게 된 결과지만 한편으로는 농산물 시장개방 확대로 외래 유입 또는 변이에 의한 신종 바이러스가 급속히 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빈도는 더 잦아지는 추세다. 2008년 이후 국내에서 새로 발생한 주요 농작물 바이러스병은 2008년 토마토황화잎말림바이러스(TYLCV), 2011년 샬롯황화줄무늬바이러스(SYSV), 2012년 순무황화모자이크바이러스(TYMV), 2013년 박과진딧물매개황화바이러스(CABYV), 토마토퇴록바이러스(ToCV) 등 9종이나 된다. 이들 바이러스병은 국내 발생사례가 없다가 농가에서 원인 모를 피해가 발생해 도농업기술원과 시·군농업기술센터가 농진청에 의뢰해 비로소 알려진 신종 병원체다. 이 가운데 2008년 경남 통영에서 첫 감염사례가 확인된 토마토황화잎말림바이러스병은 2013년까지 9개도 70개 시·군으로 확산됐다. 또 순무황화모자이크바이러스는 매개충인 벼룩잎벌레가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어 향후 급속히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바이러스병 피해 확산 우려=외래 돌발 바이러스병 확산 추세에 따라 방역당국도 대응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정부는 새로운 바이러스병이 발생할 경우 위험성 분석 후 긴급방제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전국분포조사를 거쳐 공적방제를 실시한다. 공적방제란 가축 전염병 차단방역과 같은 개념으로, 정부가 주관해 발병지역 해당 농작물을 전량 폐기처분하는 등으로 병 확산을 막는 방식이다. 더불어 국경검역 관리 병원체로 지정해 수출입 종자 또는 농산물을 대상으로 해당 바이러스병의 유무를 가려내고 있다.
하지만 식물체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1000여종에 달하고 계속 변종이 생겨나는 것을 감안하면 농작물 바이러스병 피해는 갈수록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우리나라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계속 시장개방을 확대하고 있고, 최근에는 중국은 물론 동남아 국가들과도 시장개방 협상을 진행하고 있어 향후 새로운 바이러스병 유입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신종 농작물 바이러스병 확산에 대비, 현행 관리체계를 종합적으로 점검해 미비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예기치 못한 돌발 바이러스병 발생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구제역이나 AI처럼 농작물 바이러스병의 위험성을 재평가하고 가축 전염병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범국가적인 대응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