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협이 고랭지배추 가격지지를 위해 긴급 시장격리에 나선 가운데 이경희 농협중앙회 채소사업소장(왼쪽부터), 배추 재배농가 이종봉씨, 농협 채소사업소 문진용 반장과 오영덕 팀장이 수확 중인 고랭지배추의 품질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인부들은 칼로 배추 밑동을 절단한 뒤 망포대에 3포기씩 담은 후 차량이 실어가기 좋도록 한켠에 가지런히 쌓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농업인 이종봉씨(51)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4만9500㎡(1만5000평)에 배추를 재배한 이씨는 “이달 초순까지만 해도 시세가 상품 기준으로 10㎏들이 한망당 7000원 정도 나왔는데 중순을 넘기면서부터 급락해 걱정스럽다”고 하소연했다.
22일 현재 서울 가락시장의 배추 시세는 10㎏들이 상품 한망당 6300원. 지난해 이맘때(1만2700원선)의 절반 수준이다. 전년 대비 상품의 값 하락폭은 그나마 적은 편이다. 전체의 70%를 차지하는 중·하품의 가격은 1250~3600원선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의 20~40% 수준이다. 시장에선 한망당 500~600원, 심지어 차량 운임비만 받고 무상으로 넘기는 출하주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배추 가격이 바닥권을 형성하면서 특히 중·하품 출하농가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이씨에 따르면 출하작업 비용은 품위와 상관 없이 한망당 2000원은 족히 든다. 인건비와 망포대비가 기본적으로 소요되는 데다 고지대이다 보니 길을 다지기 위한 작업차량을 수시로 임차해야 하는 등 추가 출하제비용이 만만치 않아서다. 특히 올해는 원인 미상의 바이러스병까지 돌면서 치료 및 예방 약제를 구입하는 데 지불한 비용이 예년의 두배에 달한다는 게 정선지역 농업인들의 얘기다.
고통스럽기는 산지유통인들도 마찬가지다. 인근에서 만난 산지유통인 전옥돌씨(67)는 속칭 ‘오대’라고 불리는 큰손이다.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2년째 큰 손실을 입고 있다고 전씨는 털어놨다. 그는 “지난해 김장용 가을배추부터 시세가 바닥을 기면서 산지유통인들 사이에선 ‘자기 돈 말고는 다른 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십수억원의 손해를 봤다’ ‘고랭지배추 시세가 살아나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등의 얘기까지 떠돌고 있다”고 말했다. 전씨는 “밭떼기 거래비중이 높은 배추 유통 특성상 산지유통인들이 무너지면 배추 생산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걱정했다.
8월 중하순 들어 고랭지배추의 급락세가 가속화하는 것은 추석 대목을 앞두고 산지와 소비지의 불안심리가 시장에 반영된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 고랭지배추 재배면적은 5425㏊로 지난해(5498㏊)보다 1.3%(73㏊), 예상 생산량은 18만1484t으로 지난해(20만895t)보다 9.7%(1만9411t) 줄 전망이다. 값이 올라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경희 농협중앙회 채소사업소장은 “추석 대목을 겨냥해 8월 중하순 출하용으로 아주심기한 물량 자체가 많은 데다 신종 바이러스병이 돌고 추석 이후 더 큰 폭의 값 하락을 걱정한 농가들이 수확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울러 소비지에선 수입김치가 요식업소를 사실상 점령, 국산 배추의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른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중도매인과 김치공장의 적극적인 구매의욕을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농협중앙회는 9월5일까지 최대 5384t의 배추를 시장에서 격리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추석 대목에 배추 값이 바닥세가 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 미칠 영향은 미지수라는 지적이 많다. 정작 대책을 세워야 할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석 물가 상승을 걱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서인지 배추 값 회복을 위한 시장격리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