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으면 어디든 싹을 틔워낸다
시멘트 바닥 작은 틈에서도 씨는 떨어저 조금의 습기에도 생명을 키워낸다.
제모양이 어떻튼 그렇게 나름의 존재를 드러낸다. 생명은 생명을 키워낸다. 연속되는 자연의 순환은 각자 본연의 책무와 본능의 숙명을 어디서든 드러낸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성장해 갈때 무한의 공간을 향해 자랄 때,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고 존재를 드러낸다.
나무의 그늘은 다른 생명체의 쉼터가 된다. 공존하는 자연의 공간은 경재하면서 자신의 삶의 공간을 확보하고 영위하며 이어간다.
교환과 공유 그리고 화합 상호 소통은 자연의 질서이다. 자신을 지켜내어야만 그 무엇도 가능하다. 하나의 점은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 시점이다. 그것은 출발이고 원천이다.

붓꽃, 붓 끝 모양의 뽀족한 모양을 가진 보랏빛 꽃, 10년이 지난후에 이렇게 자라났다. 뿌리가 깊고 길다.
여려해 살이 풀이기에 씨를 뿌릴 필요가 없이 늘 그자리에서 볼수 있다.

모란이다. 시의 제목에서도 화투의 그림으로도 등장하는 나무 꽃이다. 작약과 비교되는 이것은 나무과 이고 작약은 풀이다.
오갈피처럼 검은 씨가 열매 안에 있고 검정콩 모양이다.전통한옥 정원에서 자주보는 전통적인 우리 꽃이다.

벗나무 열매 벗찌, 꽃이 지난 후 그 열매가 떨어진다. 가난한 시절에는 아이들이 이것을 자주 먹곤 했다. 입 주위가 까많게 물든 것을 모르고 서로 웃고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버려진 쓰레기처럼 돼버렸다. 이리저리 밣힌다.
더 맛있는 열매들이 많고 더 달콤한 과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무를 아래서 보면 까만 콩 같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넝쿨장미, 집안이 들여다 보이는 담장에는 이런 장미들이 많았다. 꽃은 예쁘지만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젊은 시절 몇 송이 꺽어다 창가에 두고 몇일을 본 기억이 있다.

릴케가 사랑했다던 장미, 가시가 있어 왠지 역설적인 이 꽃, 서양 꽃의 대명사 처럼여겨지는 이꽃은 이제 흔한 꽃이다.

밤꽃이 한창이다. 그 냄새가 버겁다. 동네 어디든 공기를 채운다. 마지막 꽃일 게다.

동네 여귀에도 밤나무는 있다. 박정희 시절에 밥처럼 먹을 수 있다던 그 밥나무가 밤나무가 된 것이다.
많은 곳에 쓰인다. 다양한 식재료가 되어 그렇게 나무가 많아도 또 심는다.

인간이 사라지면 그자리엔 식물이 남는다. 넝쿨은 지상의 모든 것을 덮을 것이다.



한가한 시간, 동네 중심에 자리잡은 느티나무는 늘 저렇게 서 있다.

청양의 고추는 다른 지역과 다른 것이 있다. 맛이 다르다.

논과 밭의 농작물이 하루가 다르게 커 가고 있다. 벼와 고추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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