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 (勉菴 崔益鉉) 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우(祠宇)로, 1914년에 건립되었다. 현판(懸板)의 글자는 고종 황제가 내린 글 가운데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艱虞孔棘 慕卿宿德) 라는 구절에서 ‘모(慕)’자와 ‘덕(德)’자를 취한 것이다. 선생(1833∼1906)의 호는 면암,,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1855년 문과 급제 후 대원군(大院君)의 시책을 비판하여 제주도에 유배되는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있을때마다 상소하여 여러 차례 체포 되었다. 1900년에 포천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후 을 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전라도 태인·순창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다. 왜군에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서 단식(斷食)하던 중 74세에 순절(殉節)하였다. 묘소가 처음에 는 논산군 노성(魯城)에 있었으나, 예산군 광시(光時)로 옮겼다. 사우 건립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문중의 사당으로 가장하여 건립하였다. 그후 1982년에 유물 전시관, 1985년 장서각(藏書閣)인 춘추각(春秋閣); 1989년 영당(影堂)을 지었다.